타임워프(?)

사퍼/로라드렉/단편 2015. 4. 7. 22:34





* 32살 로라스가 타임워프해서 20..아니다 19살 드렉슬러 만나는 글

* 에버님의 https://twitter.com/chiznoguri/status/583689103352401920 에서

* 그러나 쓰다보니 많이 달라졌던 것이다...죄송합니다...










담뱃불이 사그라들었다. 라이터를 찾으며 담뱃갑을 열자 남은 담배는 두 개비뿐이었다. 드렉슬러는 잠시 고민했다. 다음번 지급까지는 닷새나 남아 있었다. 빌린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고민하는 사이 물고 있던 놈은 불씨가 아주 죽어버리고 말았다. 불쾌한 뒷맛이었다. 뱉어버리고 결국 하나를 집어드는데,


“기왕 꺼진 김에 그만두는 게 어떤가.”


낯선 목소리가 구김살 없이 끼어들었다.


“목도 좋지 않으면서.


마치 자신을 잘 안다는 듯한 말투였다.


바스락 소리가 나며 상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코트를 걸친 서른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드렉슬러는 그가 군인이라고 직감했다. 어쩔 수 없이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했다. 드렉슬러만이 아는 장소였다. 우연으로라도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값비싼 차림을 한 저런 사람이라면 더더욱.


“누구야.”


순간 남자는 정말로 이상한 표정을 했다. 그것은 드렉슬러가 평소 마주하는 표정들, 경악, 실망, 불안, 두려움, 분노 같은 것이 아니었기에 읽어낼 수 없었다. 드렉슬러는 다시 물었다.


“누구야. 집에서 보냈어?”


뱉어놓고도 한심한 질문이라 혀를 찼다.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쁘진 않겠군. 하지만 아니네. 그저 자네를 보러 왔을 뿐이야.”


오랜 친구라도 된다는 듯이, 그는 다가오더니 드렉슬러를 훑어보았다. 잘 벌어진 장신이었지만 엄격히 단련하는지 몸이 가벼워 보였다. 선이 굵은 얼굴에 눈만이 바다처럼 새파랬다. 자신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클까. 드렉슬러는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유쾌한 곳은 아니야. 습기차고 답답하고……그러니 담배는 이리 주게.”


그는 망설임없이 손을 뻗어 드렉슬러의 손가락 사이에서 담배를 뽑아 코트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드렉슬러는 어이가 없어 남자의 반반한 낯판대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했다.


“표정이 그대로 티가 나. 아나?”


짜증이 나 입을 다물었다. 혼란스러웠다. 나만의 공간이라고 믿었는데. 좁아터진 출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남자가 물었다.


“며칠이지, 오늘이?”


오늘, 이라고 중얼거리는 얼굴이 낯설었다. 드렉슬러는 얼결에 대답해주었다.


“9월 2일.”

“1920년?”

“1920년.”

“음.”


남자는 고개를 돌려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성년이 된다는 건 기쁜 일만은 아니지. 하지만…….”


이거라도 돌려주어야겠군, 남자는 담배를 도로 꺼냈다.


“스무 살 생일, 미리 축하하네. 드렉슬러.”

“……어떻게?”


푸른 눈이 다정히 웃었다.


“설명하기엔 아까운 시간이군.”




해가 떨어져 드렉슬러가 교사 밖 낡은 정원 뒤의 은신처에서 기어나올 때까지도 이방인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이름이나 생일과 마찬가지로 그는 드렉슬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의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학교에서도 본 적이 없다. 외국인도 아니라고 한다. 이리저리 묻던 드렉슬러가 드라군? 이라고 했을 때에야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천천히 끄덕였다.


남자는 말없이 드렉슬러를 따라왔다. 분명히 신경이 쓰였지만, 이상하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남자는 마치 드렉슬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옆에 있는 법을 따로 배운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만.


사거리에 이르자 곤혹스러워졌다. 기숙사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편지에 적힌 대로 다리오 가의 끔찍한 저택에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계획대로 하자니 한 발짝 뒤의 남자가 거슬렸다. 전혀 자기 갈 길이 없어 보였다.


이상했다. 불편하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그것에 모험을 걸어보기로 했다. 걸음을 꺾었다. 구둣발 소리가 느긋하게 따라왔다.


“일찍도 마련했군.”


이해할 수 없는 말이기에 무시했다. 외곽지의 작은 다락방이었다. 남자까지 들이기엔 비좁았지만 사람은 고사하고 생쥐 한 마리 들인 적 없는 공간이었는데도 드렉슬러는 익숙한 양 사다리를 오르는 남자의 위로 덧문을 닫아버리지 못했다. 구석에 웅크린 드렉슬러를 슬쩍 돌아본 남자는 마치 방 구조를 잘 안다는 듯 어두컴컴한 방의 윗목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촌동네의 다락방에선 하늘이 맑게 시야를 가득 채워주었다. 드렉슬러는 머리가 복잡할 때면 이곳에 와서 창을 열고 누워 밤새도록 별을 보았다. 닿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반짝임은 다락의 생도 하나쯤은 무상한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천천히 흐르는 별의 빛, 조금씩 밝아오는 물빛의 하늘, 아무 소리도 방해도 없는 작은 방 안의 자유.


그 안에 처음으로 타인이 앉아 있었다.


드렉슬러는 창가에 손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옅은 달빛과 짙은 그림자가 얼굴선을 더 굵게 만들었다. 완고한 사람 같았다. 귀족들이 흔히 그렇듯이. 명예니 영광이니 하는 것에 인생을 낭비하는 머저리들.


“귀족이야?”

“그렇지.”

“쓰레기네.”

“이런.”


남자가 팔을 내리며 웃었다.


“자신이 속한 곳을 비하하는 건 좋지 않아.”

“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사실이라.”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세상을 모른다느니, 의무가 있다느니, 왕의 명예며 기사로서의 도리며……그런 것들이겠지. 드렉슬러는 후회했다. 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랬지. 자네는 특별하니까.”


무언가가 둔중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손을 뻗어 다락에 흩어진 노트조각을 집었다.


“사과하지. 자네는 평범한 사람들의 무리에 끼이기엔 지나치게…….”


손가락이 입술을 매만지는 모양새가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드렉슬러는 노트를 돌려받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역시 내겐 말재간이 없어.”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노트조각을 걷어보았다.


“이론은 거의 완성했나 보군……만들어보았나?”


드렉슬러는 고개를 저었다.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귀족더러 팔 걷어붙이고 망치질이나 하라는 거야? 당신, 가짜 아냐?”


남자는 잠시 가늠하듯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속이 뒤틀렸다. 늘 공방을 갖고 싶었다. 혼자서 작업에 열중할 수 있는,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공간. 늘 천한 짓을 한다고 호통치던 사람들로부터 벗어나서, 혼자서.


“거짓말이 서투르군.”


손이 성큼 뻗었다. 놀라 주춤했지만 손은 자신을 지나 벽장에 닿았다. 드렉슬러는 남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어떻게. 드렉슬러는 이제 남자의 손에 들린 반토막짜리 마창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설계마저 이 다락이 아닌 곳에서는 끄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알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것을 꺼내가버렸다. 뒤늦게 수치심이 치솟았다.


“돌려줘.”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었다. 대장장이들이나 할 일을 한다며 비웃음을 사고 기껏 정리해놓은 도면을 찢길 바에야 철처히 숨기기로 했었다. 이 지긋지긋한 생도 생활만 끝나면, 저 빌어먹을 가문에서만 벗어나면, 그때엔 마음껏 다듬어보려 했던 서툰 세공품. 그것을 난생 처음 보는 타인에게 빼앗겼다. 돌려받아야 했다.


“이리 줘.”

“무겁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아냐…….”

“무거워.”

“그럴 리가…….”


그가 눈을 마주쳐왔다.


“확인해볼까?”


무엇을, 말하기도 전에 남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솟구쳤다.


능력자였나?


드렉슬러는 까마득히 솟아오른 인영을 간신히 찾아냈다. 드라군 중에서도 저 정도로 뛰어오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어처구니없는 각력이었다. 잠시 뒤 쿵 소리를 내며 남자가 창문 옆 지붕에 내려앉았다. 밤바람에 머리칼이 뒤로 넘어가 있었다. 그는 드렉슬러에게 창을 내밀며 말했다.


“확실해, 무겁군.”

“그럴 리가 없는데…….”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창가에 다리를 걸치며 남자가 말했다.


“더 가볍게 만들 수 있어. 자네니까.”


정말로 잘 안다는 듯이.


“그쪽이 어떻게 아는데?”

“내 이야기를 하기엔 아까운 시간이야.”

“알아듣게 말해.”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이야.”

“비웃지 마.”

“그런 게 아닐세.”


짜증이 치밀었다.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자신에게도 하나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거절해야 했는데도, 드렉슬러는 결국 그에게 불까지 붙여 주고 말았다.


둘은 잠시 하늘만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먼저 입을 뗀 쪽은 남자였다.


“귀족이라……자네는 확실히 귀족이야. 그렇지 않나?”

“전쟁 터지면 말 타고 가서 제일 먼저 뒈져줄 새끼들이란 의미에서라면, 안타깝게도 그렇네.”

“말은 너무 구시대적이지 않나?”

“자동차는 모양새가 나쁘잖아.”

“그도 그렇군.”


드렉슬러는 그가 담배를 태우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네니까 하는 말인데.”

“내가 누군줄 알고?”

“다리오 드렉슬러.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사람.”

“진짜 누구야, 당신.”

“그런 건 의미없대도.”


후, 연기가 흩어졌다.


“나는 사실 말일세, 사람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귀족 새끼답네.”

“나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닐세.”

“그러면 뭐? 네가 등쳐먹을 평민놈들? 아, 아니면 쿠테타라도 일으키냐? 난 안 해. 꼬실 생각 마.”

“재미있군. 하지만 나는……자네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그는 조금 머뭇거렸다. 드렉슬러는 자신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재능은 평등하지 않아. 자네처럼 천재성과 육신의 강인함을 함께 가지고 태어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지조차 온전하지 않게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 그 간극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어. 천재성은 때로 수천 수만의 범인을 능가해버리지. 그런 재능을 어떻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나?”


푸른 눈은 드렉슬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경애받아 마땅한 재능……그것이 귀족이 아니면 무엇이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무엇을 후세에 남기지?”


바람이 불어왔다. 고동색 머리칼이 밤하늘에 묻힐 듯 흔들렸다.


“세상은 평등을 이야기하지. 지고의 진리로서, 정의로서. 하지만 나는 가끔씩……그것이 질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천재성을 알아볼 수는 있어도 닮을 수 없는 나약한 이들의 질투 말일세. 부도덕한가?”

“잘……모르겠어.”

“그 질시가……자네처럼 우리에게 와주었던 진짜 귀족을, 진실로 고귀했을 이들을 잃게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면……그래, 용서할 수가 없더군.”


그가 타들어간 담배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드렉슬러는 그제야 제 담배가 그의 코트자락에 담뱃재를 잔뜩 쌓아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어어, 미……미안…….”

“아니, 괜찮네.”


담뱃재를 털어낸 자리에 섬유가 오그라든 자국이 남고 말았다. 민망해 다시 털어보았지만 자국은 사라지기는커녕 더 선명히 타들어간 자리를 드러냈다.


“옷, 날 밝으면 고쳐줄게.”

“시간이 없어.”

“어디 가야 하는데?”


그는 살짝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지금……?”

“아쉽지만.”

“어디로 가는데?”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웃는 표정이 안타까웠다. 드렉슬러는 당황했다. 이름도,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나이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가버린다고?


“어디로 가냐니까. 아니, 어디 가면 볼 수 있어?”

“해오던 대로 가면 되네. 자네는 명석하니까.”


창틀에 얹혀있던 발끝이 흐릿해졌다. 이름이라도 알려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때가 되면.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드렉슬러는 초조히 다가섰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드렉슬러를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낯선 얼굴, 마치 드렉슬러가,


소중한 듯이.


순간 드렉슬러는 발을 돋우어 그의 양 뺨을 쥐고 입을 맞추었다.


충동이었다.


하지만 잠시간의 떨림 뒤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몸을 감쌌고,


남자는 고개를 기울여 드렉슬러에게 깊이 키스해주었다.


매달린 팔에 감촉이 완전히 사라지고,


따뜻했던 품에 밤공기만이 싸늘해진 순간,


드렉슬러는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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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