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드렉

사퍼/로라드렉/단편 2015. 2. 6. 18:19








사람 한둘쯤 쪄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날씨였다. 망할 카탈루냐, 망할 지중해, 망할 알베르토. 드렉슬러는 제 앞을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사내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래 보았자 둔하기 짝이 없는 연인은 알아차리기는커녕,

 

나오길 잘했어, 그렇지 않은가?”

 

하며 웃음 핀 얼굴로 돌아보았다가, 거리에서 살인을 저지르기 직전인 드렉슬러를 보고서야 머뭇거리며 어디가 불편하느냐고,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묻는 것이다.

 

, 불편?

 

불편?

 

저 바보를 믿은 내가 병신이지, 드렉슬러는 대답해줄 기운마저 빠져 주저앉았다.

 

열흘쯤 전에, 바르셀로나에서 안타리우스의 잔당을 보았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리스에서 바르셀로나라면 배편으로 충분히 이동 가능한 거리기도 했고, 최근의 동향으로 미루어보아 단순한 도피라기보다는 좀더 체계적인 계획, 이를테면 카탈루냐의 분리주의를 충동질한다거나 하는 종류의 준동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꼴에 스페인 출신이랍시고 지명받아서, 간만에 고국에 온 것까지는 괜찮았다. 축축한 영국 날씨보다야 화창한 햇빛이 훨씬 나았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잔당은 그냥 잔당이어서, 딸려준 회사 인편에 넘겨주고 끝이었다. 회사에서 내어준 일정은 사흘이나 남아 있었다. 물론 예약해준 기차편이 그렇다는 것이지 돌아가려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만, 모처럼의 시간인데 반납하기는 아까웠다. 하지만 연구실은 저 멀리 영국에 있고, 영국에 들어가서 회사에 얼굴 비추지 않기는 좀 그렇고, 애매하던 와중에,

 

모처럼인데 나들이라도 하지.”

 

하고 웬일로 로라스가 먼저 운을 뗀 것이다. 고향 오더니 저놈도 꼴에 라틴계 피가 끓었나. 조금 기대하며 따라나왔는데, 빌라 사이를 뒤지며 안타리우스를 찾던 어제까지는 깜박하고 있었던 7월의 태양이 온몸을 지지고, 어디서 얻었는지 작은 지도를 꼬깃거리며 이리저리 발길을 꺾던 로라스가 드렉슬러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 씨발.”

 

성당이었던 것이다.

 

연인의 불경스러운 언사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로라스는 여전히 인부들이 매달려 조각이며 미장을 계속하고 있는 첨탑을 경탄스럽다는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아름답군.”

짓다 만 건물은 살 발라낸 생선뼈다귀 같은 거야.”

 

물 마실 데 없나. 드렉슬러는 흘깃 경당 안을 건너다보았지만 수반 하나 보이질 않았다. 하고많은 데 두고 하필 짓다 만 성당이냐, 청승맞게, , 잠깐.

 

이거, 그거냐?”

?”

 

작열하는 햇살에 희미하게 흐려진 첨탑 꼭대기를 향하고 있던 그가 시선을 내린다. 셔츠깃을 단정히 채우고 열주 앞에 서 있는 남자 하나, 그 옆에 팔을 걷어붙이고 널브러진 다른 남자 하나. 드렉슬러는 자신들의 꼴이 퍽 우스우리라고 짐작했다.

 

, 뭐냐, , 파밀리아?”

, 아는군?”

 

눈에 띄게 기꺼워하는 목소리였다. 가톨릭이었지, 그래. 노랗고 하얀 햇빛이 그의 고동색 머리칼 뒤에서 아룽거렸다. 꼿꼿하게 버티어 선 이마에도 땀방울은 한 줄기 가늘게 흘러내렸다. 머리카락만큼은 아니어도, 불그스름하게 그슬린 갈색의 이마. 간만에 공통의 화제를 찾은 것이 기뻤는지 무언가 설명하려는 로라스를 올려다보며, 드렉슬러는 죄책감 없이 딴청을 피웠다.

 

그래서 설계자인 가우디가 26년에 죽은 뒤에도 계속…….”

 

셔츠를 여미고 타이를 매어 핀까지 꽂은 저 가슴께를 벌리면, 의외로 하얀 살결이 나와, 잠깐 멈칫하게 된다. 물론 그 흰빛도 늘상 보는 이마가, 손이 그렇듯 상처가 나고 거칠기 짝이 없지만 야릇한 만족감이 들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소간은, 아쉬움도.

 

“……드렉슬러, 듣고 있나?”

아니.”

 

이런, 찌푸린다. 너무 무시했나. 하지만 관심 없다고. 너도 알다시피…….

 

무신론자라는 건 알지만.”

 

목소리에 미처 눅이지 못한 한숨이 묻는다. 달래주어야 하나, 귀찮은데. 드렉슬러는 시선 끝을 떼어 첨탑을 올려다본다. 로라스가 바라보던.

 

첨탑은 아직 흉한 철골을 드러내고 있지만 찌를 듯 높다. 흔한 고딕 양식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것도 아니다. 늘씬한 듯 하면서도 중간이 불룩한 첨탑을 또아리처럼 감싸며 온갖 조각과 모자이크들이 어릴 적 들었던 성경 구절을 수놓고 있다. 뻗어오른 첨탑의 끝에는, 반짝이는 별빛을 닮은 것이 얹혀 있다. 성상인지, 십자가인지, 아니면 정말 별인지는 햇살이 눈부셔 보이지 않는다. 햇살 아래서 첨탑들은, 기둥들은, 이제 별이 쏟아내는 빛무리 같기도 하다. 지금 여기, 그와 내게 쏟아지는 유성우.

 

드렉슬러?”

 

조금 풀린 목소리. 한편으로는, 제풀에 지친 목소리. 드렉슬러는 솔직하게 말한다.

 

아름답군.”

.”

 

그는 멈칫한다. 허를 찔린 것이다. 머뭇거리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랑플람 재단에 영을 보는 능력자가 들어왔다더군.”

알아.”

혹시 아는가? 그 능력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해줄지.”

허튼소리.”

 

기도와 기적에 의지하기에 세상은 너무 넓어졌어. 드렉슬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까마득한 첨탑의 끝자리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로라스라면 글쎄, 뛰어오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시험해볼 생각은 없다. 로라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드렉슬러를 바라본다. 드렉슬러는 갑자기, 저 그슬리고 진지한, 가톨릭을 믿는 서른두 살짜리 스페인 남자의, 반반하고 강인한 낯바닥을 놀려먹고 싶어졌다.

 

더운데.”

 

운을 떼자 로라스가 주머니를 뒤진다. 스카프를 찾는 것이다.

 

안에서 섹스할래?”

 

파란 스카프를 반쯤 꺼낸 채 그대로 얼어버린 연인을 두고, 드렉슬러는 혼자 흥이 나 성당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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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