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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2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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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슬러는 신경질적으로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러나 근 닷새 간 그가 한번이라도 구겨지지 않은 인상으로 헬리오스 사옥 안을 돌아다닌 적은 없었으므로, 오늘의 발걸음은 신경질보다는 더욱 험한 수사가 필요했다.
“이거 어느 새끼가 썼냐.”
이를테면 분노, 말이다.
“어느 새끼가 썼냐고 묻잖아!”
종이 한 뭉치가 말끔한 바닥을 나뒹굴었다. 드렉슬러는 던져버린 서류를 짓밟으며 회의실의 문을 거칠게 닫았다. 쾅 소리와 함께 벽이 살짝 울렸다. 타라는 책상 앞까지 밀려온 서류의 식별번호를 읽었다. 0411FFZ1. 무거운 한숨이 목에 들어찼다.
“뭐가 문제야.”
“뭐가 문제냐고? 뭐가? 이게 정상이야? 어? 정상이냐고!”
“소리만 지르지 말고 말을 해! 다들 제정신일 수가 없단 말이야!”
“제정신, 그래, 제정신. 어느 새끼냐. ‘포획’이라고 쓴 거.”
회의실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고요에 휩싸였다. 타라는 늘 이런 사단을 뚫어야만 했다.
“그럼 뭐라고 써줄까. 공주님처럼 납치당했다고 써주기를 바라는 거야? 그 알베르토 로라스를?”
드렉슬러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하, 알고 있네. 용암이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잘 아네. 로라스라고. 빌어먹을, 일주일 전까지 여기서 얼굴 맞대고 얘기하던 그 새끼란 말이다! 그걸, 무슨 화물 빼앗긴 것마냥 포획이라고 써? 네가? 네놈들이? 꼴에 능력자의 처우를 개선한다는 잘난 헬리오스 법인이?”
“어쩌라는 거야. 그건 그냥 보고서야. 해야 할 일은 산더미같이 있다고!”
“그래? 해야 할 일이 뭔데. 그 해야 할 일에 노략질당한 검룡은 어디쯤 있냐?”
“제발 좀 진정해, 드렉슬러. 걱정하는 거 이해해. 우리 모두 걱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일하는…….”
“걱정? 솔직히 말하지 그래.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그놈을 죽일 거야. 에이스 등급인 그 녀석이 가진 정보가 안타리우스에 넘어갈까봐, 혹은 클론이라도 만들어질까봐, 이도저도 아니면 그 새끼가 넘어가버릴까봐. 아냐? 아니냐? 우린 다 알잖아. 안타리우스가 ‘포획’한 능력자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알잖아’? 그런데, 봤냐? 어? 본 적 있냐?”
드렉슬러는 홱 고개를 돌려 침묵을 지키는 다이무스를 노려보았다. 넌 봤지. 기억하잖냐? 드렉슬러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 미친놈들은 말이야, 우리 몸뚱이를 뜯으면 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놈들은 널리고널린 인간이잖냐. 그래서 우리를 뜯어다가, 고물 자동차에 새 엔진을 달듯이, 그렇게 달라질 거라고 믿는단 말이야. 그놈들은 인간이지만, 우리는 뭐냐? 우리를 꿰메다가 인간이 아니게 돼버린 저놈들은?”
다이무스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방 가득, 창고 가득, 살덩이가 떠 있어……썩어버릴까봐 보존액에 넣긴 넣었는데 그놈들도 뭔지 모르는 것들이지. 팔이 날개처럼 펼쳐지기에 떼어냈더니 죽어버렸다, 밤에도 낮처럼 보는 눈을 파냈지만 이식한 남자는 장님이 되었다……그런 일지가 파리시체마냥 벽에 붙어 있다고. 인간? 미래? 그놈들에게 우리는 재료야. 멍청한 손으로 하도 자르고 붙여대니 늘 재료가 부족하지. 나는 그 누더기들을 봤어. 남의 팔다리와 눈코입을 달고 남의 기억에 미쳐서 사람의 형상을 잃은 것들이 거기엔 넘치도록 많았다고. 기억 안 나냐, 홀든? 그 망할 구마스를 지키던 놈들이 열 살도 안 되던 꼬맹이였던 거?”
드렉슬러는 발 밑에서 구겨져가는 종이를 비틀었다. 바득 소리는 조용한 회의실에는 지나치게 컸다.
“너희들은 고작 그놈이 배신할 걸 무서워하지……그래, 그 놈이 배신하면 정말 끝내주는 망신이겠지. 하지만 말야. 그 전에 대체 네놈들이 내다버린 상등품이 어떻게 난도질당할지 그 진정되신 머리로 좀 생각해보라고! 기껏 그 새끼랑 나를 스페인에서 끌어다가 여기다 처박았으면, 네놈들이 계약서에서 떠벌리던 이상을 그 이상주의자 새끼한테 좀 보여달란 말이야!”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드렉슬러는 문을 걷어찼고 다시는 헬리오스 법인을 찾아가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다. 로라스와 함께 붙잡혔던 티나 앨더슨이 배반해 헬리오스에 진입하려던 중 사살되었다. 그녀는 한쪽 팔을 잃은 상태였고 어깨를 테라듀 합금으로 이은 의수를 달고 있었다.
일곱 달이 지났다. 헬리오스 법인은 알베르토 로라스의 상태를 실종에서 사망으로 변경했고 그의 사저를 정리해 서류와 유품을 스페인의 본가로 보냈다. 드렉슬러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났다. 드렉슬러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말의 날 좋은 밤이 되면, 문간에서 머뭇거리는 듯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열쇠를 건네주었는데도 꼭, 날이 저물면 반드시 노크를 했다. 그나마도 조심스럽게 한 번 대었다가, 돌아가려는 듯 짧게 떨어져 나갔다가, 이윽고 결심한 듯 단단하게 간격을 맞춰 두 번, 우직하게도 순서가 바뀌지 않는 소리였다. 짜증 반 웃음 반이 섞여 문을 열어주면, 분명히 핑계거리인 간식이나 꽃이나 책 따위를 내밀며 들어와선 결국 키스를 했다. 사랑한다고, 보고 싶어서 불쑥 찾아오고 말았다고, 언제나처럼 미안해하는 연인을 끌어안고 침대로 뛰어들어버리곤 했다.
―딱.
일 년간 들어보지 못한 소리였다.
―똑.
일 년간 밤새워 기다린 소리였다.
―딱, 딱.
드렉슬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조차도 기억대로였다. 현관을 제 키만큼 남겨두고, 드렉슬러는 달그림자 짙은 문간을 바라보다 결국 창을 집어 들었다.
걸쇠를 푸는 손이 후들거렸다. 이를 악물며 문고리를 돌렸다. 이 판자 너머에 누가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드렉슬러가 짐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밀어 열어야 하는 한순간, 드렉슬러는 망설였다. 그러나 곧, 양손에 힘을 주었다. 이 순간 창을 쓰게 된다면 그것은 비난은 늘어놓을 수 있어도 연인을 구하려 홀로 뛰어들 용기는 없었던 제 비겁함의 대가일 뿐이었다.
인영은 그림자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기억보다 훨씬 왜소해 보이는 몸은 웅크리듯 벽에 기대어 옷깃을 당겨쓰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다시금 창을 움켜쥐었다. 그일까. 저 어둡고 작은 그림자가, 알베르토 로라스일까.
“……들어……가게 해, 주겠나.”
드렉슬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갈라지고 쉰 목소리는 발음마저 불분명했다. 무언가가 끊긴 듯 듣기 거슬리고 탁한 소리였다. 희미한 음색의 흔적에 머뭇거리는 드렉슬러에게 그가 한 발짝 다가섰다. 썩는 듯한 악취가 맴돌며, 몸이 반쯤 달빛에 비쳤다.
비명을 지를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로라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던 것 같다.
말라 비틀어진 피부는 종기와, 종기가 터져버린 진물이 말라붙어 생긴 상처로 가득했다. 검붉게 떠버린 피부는 얇고 창백해 뼈가 그 밑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보일 것만 같았다. 야윈 턱이 기괴하게 도드라졌고, 입술은 녹아내린 버터처럼 떨어져나가고 없었으며 턱뼈에 달라붙은 잇몸에 간신히 붙은 이들이 입술로 가리지 못한 채 흉히 바람을 맞고 있었다. 찢어진 눈꺼풀은 피가 말라붙은 채였다. 눈 주위가 온통 피투성이로 돌출되어 있었다. 맑고 새파랬던 눈은 탁했고 한쪽은 아예 하얗게 보이지 않았다. 쥐어짠 것처럼 무너진 코는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고, 머리칼은 온통 백발이었으며 뜯겨나간 것처럼 듬성듬성했다.
그가 손을 올려 모습을 가리려는 듯 물러섰다. 그러나 손 역시 해골처럼 가늘고 종기투성이였으며 손톱은 약지 하나에만 남아 있었다. 다시 손을 내린 그가 힘겹게 청했다. 부탁이, 있어……오래……머무르지 않겠네. 드렉슬러는 그의 혀가 부자연스럽게 올라간 채 한토막이 떨어져나간 것을 보고 말았다. 모습 하나하나가 난자하듯 눈에 와 박혔다. 그럴 리가 없었다. 드렉슬러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이, 사람이라고 믿기조차 어려운 이 형상이, 정말로…….
“……로라스.”
불린 이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이름이 맞다는 듯 끄덕였다.
“알베르토……로라스…….”
“그래…….”
오랜만에 듣는군. 힘겹게 목소리를 낸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놀라 바라보았지만 마른 종기가 찬바람에 찢긴 것이었다. 그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부어오른 살갗이 터지고, 그 자리가 곪아 부풀어 다시 터지고, 찢어지고, 다른 살갗마저 뒤덮었다. 드렉슬러는 흐려지는 눈앞을 애써 훔치며 문간에서 비켜섰다. 자. 그는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언뜻, 눈길이 드렉슬러가 손에 쥔 창을 스치며 웃음소리 비슷한 것이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앉으려 하지 않았다. 의자를 내어 주어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고 다리마저 절고 있었다. 말라가는 입안을 달싹이던 드렉슬러는 그가 왜 고집을 피우는지 깨닫고 말았다. 드렉슬러는 침실로 뛰어가 시트를 통째로 들어내 의자 위에 씌웠다.
“이야기 끝나면 벽난로에 태워버릴 테니 앉아.”
머뭇거리며 앉는 무게가 실릴 때마다 시트는 붉게, 노랗게, 검게 젖어 갔다. 드렉슬러는 거기서 시선을 떼려 애쓰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길어. 나는 부탁을 하러 왔네. 바로 떠날 테니……들어주게.”
“들어야겠어.”
“나를 믿지……않나?”
빛을 잃은 눈이 드렉슬러를 향해 물었다. 빌어먹을 멍청이, 드렉슬러는 목이 메고 말았다.
“날이 밝는 대로 헬리오스에 가자. 치료를 받아. 네가 하려는 게 뭐든, 그 다음에도 충분해.”
“치료…….”
그는 뼈마디가 튀어나온 손을 내려다보다 드렉슬러에게 말했다.
“거울이……있나?”
“거울?”
“그래, 세울……수 있을 만한…….”
드렉슬러는 허둥지둥 복도 칸막이의 벽거울을 떼어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간신히 닦고 그에게 거울을 주었다. 그는 한 걸음쯤 떨어진 탁상 위에 그것을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천천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형체를 잃은 코를 만져보았다가, 잇몸이 까맣게 변색된 위를 없어진 입술로 덮어보고 싶은 듯 이를 물기도 했다. 어디에도 윤기 도는 고동색은 남아 있지 않은 백발이 힘없이 손가락에 닿았다. 빛 없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그는 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더……형편없어졌군.”
“더……?”
“창을 한 자루……내주지 않겠나?”
드렉슬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있어……다른 이에겐 맡기고 싶지 않군.”
“……내게도?”
드렉슬러는 고개를 든 로라스를 향해 재차 물었다. 내게도 맡길 수 없어? 그러나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자네에게만큼은, 절대로.”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어조였다. 드렉슬러는 화가 났다.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한 건데! 그 꼴로 뭘 하겠다고! 치료 받으러 가자, 응? 알베르토……지금이라도, 아직 사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그를 보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자신이 그의 고통에서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그가 저 몸을 끌고서 자신을 찾아왔는데도 자신은 그에게 아직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현기증이 몰려왔다.
“괴로운가……?”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라스.”
“그러니 더욱……내가……해야 해.”
눈가에 맺힌 피를 닦으려는 듯 로라스는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찍었다. 그때마다 점액질로 변한 피와 함께 살조각이 찢겨나갔다. 드렉슬러는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는 힘에 부친 듯 숨을 내쉬었다.
“그래……자네는……현명하지……고집부리려던 내 잘못이야. 전부, 말해주겠네.”
“전부…….”
“단, 조건이 있어.”
드렉슬러는 순간 경계하고 말았다.
“전부 듣고 나면……반드시 내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네.”
“네 부탁이라면…….”
“창을 내주게. 그거면 돼.”
로라스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드렉슬러는 고개를 끄덕인 순간 알게 되었다.
“템즈 강 북쪽에 클론 연구시설이 있어.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지. 거길……파괴할 거야.”
“로라스!”
그런 건 네 몸으론, 이번에야말로 만류해야만 했다. 그러나 로라스는 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거기서 만들고 있는 건……내 클론이야.”
“너……?”
“그러니 내가 해야만 해. 다행히 아직 형체도 갖추지 못한 상태일 테니……나는 내가 빼앗긴 조직이 담긴 용기만 파괴하면 되네. 실패할 확률이 높은 클론이라고 했지. 그러니 인력도 얼마 없을 거야.”
“‘했’다고?”
로라스는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처음에 나를……설득하려고 했지.”
드렉슬러는 천천히 듣게 되었다. 알베르토 로라스가 어떻게 인간의 형상을 잃게 되었는지.
“가문……헬리오스……명예……신……그들은 더 나은, 더 헌신할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고 말했어. 이단자들의 형제애와 그들 조직의 방대함과 그들이 세상을 집어삼켰을 때 쏟아질 헌사와 그리스도보다 위대한 현시대의 새 메시아에 대해……우습지 않나? 더 강한 왕을 따라 자리를 바꾸는 자를 배반자라 하지. 어느 누가 배반자에게 영광을 예비한단 말인가? 그들은 곧 알았고……더 천박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골랐지.”
고문이었다. 매질과 채찍질 뒤에 피가 흐르는 몸을 더러운 물에 가두었다. 발목을 매달아 몇 시간이고 한나절이고 방치했다. 인두를 달구어 살갗을 태우고 유리조각 위에 무릎을 꿇게 했다.
“그들은 내가 반드시 굴복하리라고 믿었어. 실패한 적이 없던 모양이더군. 올곧을수록 꺾는 것도 간단하다고도 말했지. 많은 이름을 들었네. 그들은……내가 굴복하리라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8개월이 흘렀다. 로라스는 그조차 경박한 고문자의 이야기에서 알았다고 했다. 크리스마스의 인파 사이에 끼어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모양이었다고 했다. 피를 흘리며 사슬에 묶여 있는 로라스에게 몇 번 보았던 자가 다녀갔고, 심약해 보이는 몇몇이 로라스를 살피며 고개를 저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때 들었네. 클론은 의식이 불안정해서……본체가 완전히 설득된 자라도 위험하다고. 그러니 내 클론은 통제불능일 가능성이 높았겠지.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싫었던 모양이야. 칼이 종아리를 찢는 것을 느꼈지. 왼다리가 엉망이 됐어. 피가 몇 번 뽑히는 것을 느꼈고……문이 닫혔지. 난 언제나처럼……고문관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
손이 천천히 거울 속의 상을 만졌다. 로라스는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오지 않더군. 아무도. 드렉슬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그 때……?”
“아닐세.”
순간 일그러지는 얼굴은 드렉슬러가 본 가장 고통스러운 뒤틀림이었다. 흐, 그는 새는 조소를 냈다.
“가장 추악한 고통이 시작됐던 거지.”
로라스는 전등도 켜지지 않은 방에 남겨져 있었다. 상처는 얼기설기 꿰매인 채 피를 흘리고 있었고 고문의 흔적이 고통을 호소했다. 시계 없이도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났다고 여겼을 때 로라스는 의아해졌다. 어째서 아무도 오지 않지? 깜빡 잠이 들었다 깨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라스는 사슬을 당겨보았다. 힘이 부족했다. 다리 하나가 엉망이 되어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 동안 끙끙거리고서야 간신히 고리 하나를 끊었다. 탈진해 쓰러졌다.
다시 깨었을 때 역시 로라스는 혼자였다. 끊긴 사슬은 그대로 곁에 있었다. 비틀거리며 문가로 다가서다 문득, 로라스는 목이 마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기갈에 미치게 만들 생각이었던 거야. 아귀처럼……입에 넣을 것만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는 괴물로.”
문은 단단했고, 갈증은 심해졌다. 며칠을 마시지 못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허기와 갈증이 뒤섞여 입이 바싹 말라붙었다. 혀가 입천장에 붙은 듯 떨어지려 하질 않고, 눈이 당기기 시작했다. 고문은 몸을 부러뜨렸지만, 기갈은 몸을 안에서부터 파괴했다. 로라스는 찢어진 손을 문에 허망히 긁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깬 것은 몸 위로 쏟아진 물 때문이었다. 움직여 삼킬 기운도 없어, 입 안에 흘러든 물을 넘기려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안쓰럽다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나를 앉혀선……거울을 가져다주더군. 이렇게 말이야.”
로라스는 거울을 만지고 있었다. 손가락을 따라 피고름이 묻었다. 드렉슬러는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 안에는……피눈물을 흘리면서 온 몸에 종기가 난 깡마르고 더러운 사내가 있었어. 입술은 검은 점액처럼 변해 덜렁거렸고……눈썹은 전부 빠지고 없었지. 내가 손을 뻗자 그도 더럽고 야윈 손으로 마주해오더군.”
믿을 수가 있었겠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그들이 말했어. 돌려주겠다고. 전부 원래대로 해 주겠다고. 그들에게 협력하기만 하면……. 나는 굳어버린 살덩이를 떨어뜨리면서 말했지……그럴 재주가 있거든 사자심왕의 무덤이나 파보라고 말이야……그들은 한 번 더 권했지. 전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들은 곧 나를 가두고 문을 닫았어.”
차라리 그랬어야지, 드렉슬러는 소리칠 뻔 했다. 왜 버텼어, 미련한 새끼야. 이 꼴로 뭘 하려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막으려 이를 악물어야만 했기에, 목소리는 쓰린 목 안으로 자꾸만 밀려들어갔다.
“눈물이……점액처럼 눈가에 엉겨붙더군.”
시선이 천천히 거울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곳에서……처음으로 울었어……울고 있었는데도……눈물은 눈에서 떨어지질 않았지…….”
그는 종기투성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웅크렸다.
“나는……이 대가로……분명……자네를 잃을……테니까…….”
그는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자네가 나를 동정할지언정……내 스스로 자네를 사랑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
아는가, 나는 정말……포기하고 싶었어……. 흐린 목소리가 드렉슬러를 향해 부서져왔다. 차라리 신께 묻고 싶었어. 이 인내의 대가로 제가 얻는 바가 무엇입니까, 제가 어째서 이곳에 있어야만 합니까, 제 믿음이 그토록 부족했습니까, 제가 지은 죄가 그토록 컸던 것입니까.
“결국……나는 늦었지…….”
로라스가 가망 없는 투쟁을 계속하던 봄날, 안타리우스 거점의 위치를 알아낸 지하연합 소속의 능력자들이 시설을 공격했다. 시설은 로라스가 느끼던 것보다 훨씬 소규모였다. 단지 지하 깊숙이 숨겨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급히 자료를 챙겨 도주하면서, 초주검이 된 로라스를 데려가지 않았다.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기력이 쇠한 로라스는 짐이나 다름없었고, 그렇게 옮겨보아야 로라스가 협조해올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들은 마침내 로라스를 포기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사슬에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물을 마시지 못한 지 나흘째였고 소란이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무엇인지 생각하기엔 판단력이 흐렸다. 로라스는 최하층에 구금되어 있었고, 지하연합 공격자들이 발견한 것은 상층부의 전투시설 뿐이었다. 그들은 교전 후 도주하는 잔당을 쫓아 시설을 빠져나갔고, 로라스는 마치 무덤에 묻히듯 땅 속 깊이 홀로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공격자들은, 한 사고로써 로라스를 땅 위로 끌어내고 말았다.
교전 중 빗나간 공격이 상수도를 건드려, 천장으로 물이 새기 시작한 것이다.
물방울 소리에 로라스는 동물적으로 움직였다.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금 더. 맑은 물을 느낀 로라스는 물을 마셨고, 정신이 들고도 한참을 더 마셨다. 어지러워질 정도로 물을 마시고서, 로라스는 발목까지 물이 차 있음을 알았다. 야윌 대로 야윈 손목에 감긴 족쇄는 물 안에서 미끄러져 빠지고 말았다. 비틀거리며 문을 치자, 문은 삐걱이며 열렸다. 로라스는 열려 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제의 일이야.”
로라스는 드렉슬러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그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있다면, 평온을 찾은 듯 보였다.
“이제 창을 내주겠나?”
드렉슬러는 대답 대신 서재로 들어갔다. 잠시 뒤 드렉슬러는 로라스를 위해 만들어두었던 창 한 자루를 내밀며 물었다.
“들 수 있겠어?”
“예전같지야 않겠지만.”
“제일 가벼운 거야.”
“감사하지.”
로라스는 창을 받아 쥐었다. 그는 살짝 버거운 듯 의자를 짚었다.
“그러면, 가보겠네.”
“……조심해.”
이제 두 사람은 문간에 서 있었다. 드렉슬러도 로라스도 망설이고 있었다.
이것이,
“드렉슬러.”
그가 택한,
“말해.”
죽음의 방식이었으므로.
“자네를 사랑해.”
그는 한 계단 내려섰다.
“보고 싶어서……견딜 수가 없어서……불쑥……오고 말았어…….”
그리고 그림자에 섞여 떠나갔다.
드렉슬러는 몸을 돌려 늘 앉던 의자에 앉았다. 얼룩진 시트가 덮인 의자가 드렉슬러를 마주보고 있었고, 거울은 어느 샌가 쓰러져 깨져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이틀 뒤, 헬리오스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템즈 강 북쪽의 민가 지하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현장에서 안타리우스의 생화학자 2명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한 명은 생포되었으며 그는 알베르토 로라스의 클론을 만드는 중이었다고 자백했다. 헬리오스는 알베르토 로라스는 이름을 듣고 현장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완전히 불탄 신원미상의 남성 시체만을 발견했다.
드렉슬러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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