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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8 타임워프 뒷얘기 2
글
* 앞얘기 : http://koaarenim.tistory.com/34
* 에버님 스릉흡느드...
충동이었다.
비틀거리는 발이 닿은 곳은 회사 근처의 골목이었다. 어두워진 가운데 몇 군데 불이 밝혀진 창이 보였다. 현기증이 몰려들어 담벼락에 기대어섰다. 떨리는 손으로 입술을 만졌다.
자신이……그를?
어린 그는 확실히 사랑스러웠다. 자신을 숨기려 드는 어린아이다움은 지금의 터무니없이 당당한 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서투름이었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한 불안한 눈빛, 그럼에도 반짝거리던 재능. 지금도 남아 있는 냉소적이기 그지없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아직 덜 여물어 부드럽게 안겨오던 몸.
어째서?
그는 어린아이였다. 충동에 휩싸여 저지른 일이라고 하면 되었다. 곧 잊었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은, 어째서.
어째서 그를 끌어안아 버렸을까.
어째서 그것만으로 모자라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숨결을 탐하고 말았을까.
공간을 열어주어야 했을 게이트가 잘못되어 한참 과거의 스페인에 떨어져버렸음을 깨달았을 때, 로라스는 별 생각 없이 눈앞의 사관학교로 걸음을 옮겼다. 벽에 붙은 관보는 1920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14년 전이라. 그렇다면 드렉슬러가 이곳에 남아있을 나이였다. 그가 언젠가 이야기해주었던, 정원의 은신처가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어 좁은 통로를 지나자 거짓말처럼 그가 있었다. 조금 더 작고,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고, 막 담배 한 개비를 빼어문 모습으로.
그 모습은 비슷하면서도 낯설고, 지금의 확신 가득찬 그와는 달리 돌보아주어야 할 것 같은 안타까움마저 일어, 로라스는 평소답지 않게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까지 꺼냈던 것이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초조하게 이름을 묻던 목소리,
서툴게 대어오던 입술,
떨면서도 꽉 감기던 팔의 감촉,
분명하게도 그 모든 것은……사랑스러웠다.
알베르토 로라스가?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허탈하게 웃으며 로라스는 걸음을 떼었다. 여섯 시엔 보고했어야 했다. 하늘이 어둑한 걸 보아하니 열한 시는 되어 보였다. 어지간한 사람은 퇴근했는지 문도 잠겨 있었다. 불이 켜져 있는 곳이 없나 둘러보다, 복도 끝에 환히 새어나오는 빛에 눈길이 멈추었다. 하지만 지금 로라스가 가서는 안 되는 곳이기도 했다. 밤늦도록 불 켜진 채 간헐적인 파열음을 내고 있는 그곳은 드렉슬러의 공방이었으므로.
그답지 않게 로라스는 망설였다. 몇 걸음만 더 가면 드렉슬러가 있었다. 고귀함. 지켜야 할 유산. 그에게는 한번도 말한 적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군, 로라스는 그만 허탈해졌다.
로라스가 입맞춘 그는 14년 전의 어린아이였다. 지금의 그가 아니었다. 불안에 떠는 낯선 모습이 로라스를 혼란스럽게 한 것이다. 공방에서 끌과 망치를 다루고 있을 드렉슬러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시원하게 독설이라도 몇 마디 들으면 정신이 들겠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로라스는 공방 문을 열었다.
“드렉슬러, 날세.”
“어디 갔었냐? 기술팀에서 너 사라졌다고 난리더만.”
돌아보지도 않은 채 사포질을 하고 있는 등이 지나치게 익숙해 미소짓게 된다. 짐짓 서운한 듯 물었다.
“전혀 걱정되지 않았나 보군.”
“전쟁터에서도 안 뒤지는 새끼가 몇 시간 사라졌다고 퍽이나 일 나겠다. 해봤자 어디 이상한 데 떨어졌겠지.”
“믿어주니 든든한걸.”
“뭐 잘못 먹었냐? 징그럽게.”
사포질을 마쳤는지 구부린 철판을 들어 전등불에 비추어본다. 멋대로 흐트러진 머리모양을 보아하니 종일 여기 있었던 모양이었다.
“창인가?”
“엉.”
“만져봐도 되겠나?”
대답 대신 끄덕인다. 아직 접합부가 덜걱거리기는 했지만 매섭고 훌륭한 무기였다. 이것도 좋은 작품이 되겠지.
“가볍군.”
“더 줄일 거야.”
“강도가 약해지지 않겠나?”
“날 뭘로 보고.”
자신만만한 표정에 웃어버리고 만다. 로라스가 아는 다리오 드렉슬러였다. 당당하게, 주변 시선 따위엔 전혀 개의치 않고 제 빛만을 가꾸어가는, 로라스가 지켜 주고 싶은 특별한 세계.
책상 위에 어질러진 연구일지를 뒤적이던 드렉슬러가 담배 하나를 빼물었다. 등 뒤로 꽁초가 수북하게 쌓인 재떨이가 보였다. 불을 붙이려 고개를 기울인 그가 콜록였다. 로라스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목도 좋지 않으면서…….”
다음 순간 로라스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드렉슬러는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 채 로라스를 낯선 사람처럼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이 흡연하는 데 참견하는 사람을 싫어했다. 아직 그와 말 몇 마디 나누어보지 않았을 적에, 누군가 그에게 담배는 끊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그 자리에서 불 붙은 꽁초를 면전에 던져버리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꽤나 인상적인 광경이었으므로, 로라스는 괜히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말은 꺼내지 않았었다.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 보군. 로라스는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네, 별 뜻은…….”
“어디 갔다왔냐?”
“응?”
딸깍,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디 갔다왔냐고.”
무릎에 팔꿈치를 얹은 채, 그는 로라스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낯선 사람을 관찰하듯이. 로라스는 당황했다. 드렉슬러가 담배 든 손가락을 내리며 다시 물었다. 어디 갔었냐고, 알베르토 로라스.
“드렉슬러, 그건…….”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를 만났다고? 14년 전의 그를? 머뭇거리며 변명거리를 찾는 동안 그가 바싹 다가오더니 노골적으로 로라스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로라스는 그것을 빼앗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드렉슬러가 시선을 내리더니, 로라스의 코트 한자락을 집었다. 낯선 신음소리가 들렸다. 얼결에 내려다보자 드렉슬러는 코트 위의 타버린 자국을 쓰다듬고 있었다. 14년 전의 그가, 한 시간 전에 내어버린 흔적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드렉슬러가 담배 한 모금을 삼키더니 그 자국 위에 거칠게 담배를 비벼 꺼뜨렸다.
“개자식.”
영문을 몰라 물어보려는 순간 입술이 덮쳤다. 한심하게도 거부할 수가 없었다. 끌어안으려 하는 순간 입술이 떨어지고 말았다. 드렉슬러가 놀란 로라스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씩씩거렸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는데…….”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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