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님께

사퍼/로라드렉/단편 2015. 3. 24. 15:10




알베르토 로라스라는 인간을 정의로서만 정의한다면, 크게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한 인간에게 내재하는 복잡성이나 기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로라스라는 용기사는 분명 정의라는 가치를 삶에 실현하는 데 분투하는 사람이었으나, 기묘하게도 그 정의의 잣대는 그에게 있지 않았다.


세간에서는 그런 태도를 중립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립이라는 단어는 혼돈만큼이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사다. 로라스는 늘 길을 찾아,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돌아보는 일도 후회하는 일도 없이 걷는다. 그의 길은 맹목적이고 신학적이기까지 한 전진이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섭리와 도덕에 따라 움직이는 완결된 세계.


드렉슬러는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세계를 건너다본다. 그가 사랑하는 가치들, 명예, 도덕, 공정함, 평화, 신앙, 그러한 이름들이 가지런히 닦여 천천히 나아간다. 그가 저 멀리에 놓아둔 지고의 정의를 향해.


드렉슬러는 이따금 생각한다.


완성된 세계가 전진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고.




***




그 임무는 이상했다.


드렉슬러는 탁 트인 개활지와, 자신을 새까맣게, 새빨갛게 둘러싼 적기사단과, 송신이 끊긴 무전을 보았다.


창을 쥔 손 아래로 미끄러지는 지형도가, 드렉슬러가 밟고 선 개활지를 협곡으로 묘사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무수한 총검이 자신의 얇은 갑주를 향하는 가운데, 일직선으로 강하하던 섬광을 보았다.




***




“몸은 좀 어떤가.”

“그냥 그래.”

“당분간 외근은 하지 말게나.”

“네가 그러지 않아도, 시켜 주지도 않아.”


드렉슬러는 로라스가 건네준 차를 홀짝였다. 16개의 자상, 3개 골절, 2개 탈골, 내출혈과 긴 쇼크, 5일간의 혼수상태. 로라스가 헬리오스 재단 의료원에 엎어놓은 다리오 드렉슬러는 숨만 붙은 고깃덩이에 가까웠다. 그가 드렉슬러를 찌른 적기사의 무리 위로 사정없이 낙하하던 순간에도, 긴 총검은 드렉슬러의 사지를 할퀴고 있었다. 비린 액체가 목울대를 넘는 것을 느끼며, 드렉슬러는 연인에게 멋들어진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잠깐, 헬리오스 연구실에 놓아 둔 연구일지에 대해 잠깐, 시야에서 사라진 그가 숨이 끊기기 전에 자신에게 닿아줄 수 있을지에 대해 잠깐, 조금씩, 차곡차곡 생각했다. 이렇게 병원의 하얀 침대에 앉아 돌아보자면 그랬다.


로라스가 빈 찻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드렉슬러는 군말없이 그것을 비웠다.


“무리하지 말아.”


흔들리는 어조는 자못 안타깝다.


“쓸데없긴.”


찻잔을 내려놓는 타각, 소리가 유난히 컸다.




***




“여긴 턱이 높아서, 잠시만 기다리게.”

“혼자 되니까 그냥 좀 비켜라.”


병원에서 달아준 목발이 문제였다. 로라스는 아무리 떨쳐내도 기어이 쫓아와 드렉슬러가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간섭하고 걱정했다. 여기는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여기는 경사가 졌으니까, 여기는 계단 폭이 좁으니까. 도대체 회사에 드렉슬러가 발 디딜 곳이 있기는 한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목발을 던져버리기엔 걸음이 아직 불안해, 별수없이 절뚝거릴 수밖에 없고, 그것이 로라스의 행동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본디 걸음이 빠른 사람인데도 드렉슬러에게 맞추느라 한 걸음 내딛는 데 한세월이 걸려도 그는 아무런 불만도 내비치지 않는다. 약자를 배려하는 기사. 드렉슬러는 진부한 도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쫓아버릴 마음도 먹지 못한다. 몸이 불편해져 마음도 나약해졌을 뿐이라고, 드렉슬러는 스스로를 판단내린다.


로라스가 사다 주겠다고 말렸지만, 혼자 회사 한구석에 앉아 기다리기가 싫어 바깥에 나가 끼니를 때웠다. 나온 김에 택시를 불러 좋은 곳으로 옮기자는 제안도 무시했다. 드렉슬러는 단지 회사에 혼자 앉아 있기가 싫었다. 로라스는 앓는 연인에게 훌륭한 식사를 대접하지 못한 것이 못내 신경쓰이는지, 몇 번이고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닥쳐 주면 좋겠어. 드렉슬러는 층계참에 기대어 헐떡거리며 짜증스레 뱉었다.


걸음이 지나치게 느려, 드렉슬러의 연구실이 있는 3층까지 올라왔을 때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버린 뒤였다. 로라스는 업어 주고 싶다는 의중이 온 몸에 풍기는 모양새로 드렉슬러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닥치라는 말은 잘 들어서, 달싹대는 입술이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멀찍이, 누군가가 연구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두엇의 사내는 서류 한 묶음을 들고 저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코트 깃에 달린 표지는 인사과의 것이었다. 빈 연구실에 헛걸음을 한 것이 짜증스러웠는지, 한 사람이 투덜거렸다.


“하여간, Faith만 아니면 일거리 하나 줄어드는 거였는데.”


초조히 돌던 로라스의 걸음이 뚝 멎었다.


“무슨 수로 말렸겠냐. 뭐, 내통하지 않았다는 거 확인한 거야 좋은데.”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아냐? 저 머리로 증거인멸이 대수일까. 거기서 죽어버려야 편했다고. 괜히 반주검을 들고 와선, 약값이 아깝다, 아까워.”


로라스, 드렉슬러는 파르르 떨리는 그의 손을 붙잡는다. 다문 채 그들을 향한 표정이 푸르게 싸늘하다.


“어차피 제멋대로라 도움도 안 되는데, 의사들이란. 까짓 거 자고 있을 때 약 놓고 어이쿠, 가망이 없다고 했잖아요, 하면 그만일걸.”

“멍청하게 굴지 마라. 니 말마따나 머리 좋은 놈인데 눈치 까고 신문에라도 찌르면 우리 부서는 끝이야 임마.”


손에 힘이 들어간다. 드렉슬러는 버겁게 그 단단한 손을 붙든다. 로라스, 불러 보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드렉슬러는 눈치채고 있었다. 회사가 고의로 그를 그 사지에 몰아넣었다고. 적기사의 적개심이 회사에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혹은 애사심 따위와는 거리가 먼 그가 적기사와 손잡을 것을 우려해. 물론 후자는 틀린 추측이었으므로, 드렉슬러는 그를 죽이려 갈아온 총검이 무성한 광장에 홀로 떨어져, 꼼짝없이 달려드는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것은, 무전이 끊겨 이상하게 여긴 로라스가 드렉슬러를 찾아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눈을 떠, 흐리멍텅한 시야에 회사 특유의 대리석 천장이 들어왔을 때, 드렉슬러는 골치아파졌다고, 살아 있다는 안도보다 그것을 먼저 떠올렸다.


로라스, 손이 빠져나간다.


느리고 목발에 의지한 걸음으로 그를 붙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망설임없이 한 사내를 후려친다. 뒤늦게 로라스와 드렉슬러의 존재를 알아챈 사내들은 주춤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쓰러진 하나를 짓밟고, 하나의 멱살을 틀어쥔 채, 로라스는 믿을 수 없이 사나운 목소리로 추궁했다.


“설명해줬으면 하는군. 내통이니, 눈치니,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잠깐, 로라스 씨, 이거 놓고…….”

“말해!”


분노에 찬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 울린다. 드렉슬러는 벽을 짚으며 겨우겨우 그를 쫓는다.


먼 등이 완강하게 곧다. 평범하지 않은 완력에 훌쩍 들린 사내가 발버둥치며 콜록인다. 대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 여겼는지, 로라스는 사내를 팽개치고 어디론가 뛰어가버린다. 불러세울 틈도 없었다.


방향으로 보아 브뤼노가 있는 4층이었다. 쓰러진 채 욕설을 뱉는 사내들을 지나 계단에 주저앉을 듯 손을 짚었다. 숨이 차올랐다. 빌어먹을, 휘청일 때마다 옆에 있어주던 존재의 부재가 뼈저리게 느껴져 비참했다. 거의 기어가듯 브뤼노의 방 앞에 닿자, 먹먹한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당신들이, 당신들이 만든 악연입니다! 그에게 적기사들과 싸우라고 명령한 건 당신들이었어요! 회사가 아니었다면 그가 적기사에게 원한을 살 이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말했잖나, 로라스. 정보가 새나가고 있었어. 수시로 적기사들과 마주쳤지. 그리고 적기사와의 접점은, 알다시피 그뿐이었으니까. 우리는 해야 하는 일을 한 거야.”

“해야 할 일이요? 능력자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며 꾀어놓고서, 입장이 불리해지면 버리는 것이 회사의 목적입니까?”

“꾀었다니 말이 심하군. 다리오는 아마 능력자의 권익 같은 데엔 관심이 없을 텐데.”

“잘 아시네요, 브뤼노.”


문간에 간신히 기대어, 아찔한 숨을 고르며 뱉었다. 로라스가 벌컥 돌아보았다.


“그러니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러시아 놈들이랑 내가 편지 교환하는 사이라는 오해도 좀 풀어주시죠. 거기 소리지르는 놈도 좀 돌려주고.”


으, 가쁜 숨이 꼴깍 넘어감과 동시에 목발을 놓쳐버렸다. 기겁한 로라스가 달려와 받쳐주었다. 가자, 돌아가자, 로라스. 더 버틸 수가 없어 목에 매달리며 속삭였다. 미안하네. 그가 읊조리며 몸을 안아올렸다.


“나 휴가 좀 줘요. 그쪽에서 오해하는 바람에 황천 갈 뻔 했으니까.”

“연구실을 조사해도 된다고 한다면 허락해주지.”

“물건만 제자리에 돌려놔요. 훔쳐갈 거리도 없으니.”


대답을 듣지는 않았지만 로라스를 재촉해 빠져나왔다. 지나치게 숨이 차 쿵쾅거리는 가슴에, 꽉 감싸인 타인의 숨이 느껴져 고개를 파묻었다. 힘없이 흔들거리며 속삭였다.


“멋대로 나서지 마, 내 일이야.”

“하지만, 드렉슬러.”


어느 새인가 연구실이었다. 그가 의자 위에 드렉슬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한가득인 얼굴에 미처 가시지 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손이 뺨을 쓰다듬었다.


“자네를 잃을 수도 있었어.”


분노를 감추지 못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몸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드렉슬러는 한숨을 쉰다.


“영영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단 말일세.”


무언가, 성냥불을 긁듯이 터지는 느낌이 든다.


약해져서, 이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걷는 것조차 버거워져서, 마음조차 나약해져, 그뿐인 것을.


“그랬군.”


불길이 이성을 집어삼켜 사정없이 솟구친다.


“내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네 애인이 비겁자가 되는 게 싫었나 보네?”


쓰다듬어주던 손이 멈춘다.


새파랗게 맑은 눈동자가 서서히 차갑게 굳어간다.


연민과 애정 대신에 어두운 분노가 표정을 덮는다.


이런 얼굴로 브뤼노를 대하고 있었을까.


날카롭게 굳은 시선이 품평하듯 드렉슬러를 훑는다. 싸늘하게 서리가 타내리는 듯해, 드렉슬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다.


미끈하게 직선을 그리며 닫혀 있던 입술이, 낮게 묻는다.


“다시 말해 보게.”


못할 줄 아나 본데.


“네 도덕관에 맞는, 이상형이 못 돼줘서 미안하다고.”


하, 한숨같은 웃음이 흐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정말로, 드렉슬러는 자신이 나약해졌음을 느낀다. 싫다. 이 일방적인 호의가, 마치 자신만이 짐이고 오욕인 것 같은 상황이, 그를 감내한다는 듯이 무릎꿇고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의 티없음이.


“그렇잖냐? 부끄럽겠지. 천하의 알베르토 로라스가 배신자를 애인으로 뒀다고 하면, 안 웃기냐?”


그런데도,


“그래, 우습군.”


턱이 붙들린다. 시선이 바짝 닿아온다.


“아는가?”


눈은 여전히 새파랗게 이글거리며,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로비에서 자네를 범할 수도 있어. 그래, 자네가, 다리오 드렉슬러가 내 것이라고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만 말문이 막힌다. 무슨.


“부끄럽다고? 그건 자네겠지. 두려워하잖나? 이 관계가 세상에 알려질까봐, 자네에게 덧붙여진 죄악이 한 겹 늘어날까봐. 자네가 특별하지도 명석하지도 않은 남자와 관계한다는 것이 수치스러워서.”


틀어쥔 악력에 고통스러워진다.


“나는 용서하지 않아.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오욕을 씌우는 것도, 내게서 빼앗아가는 것도, 내가 허락지 않은 상처를 입는 것도. 설령 자네라고 해도.”


로라스, 괴로운 가운데 속절없이 눈물이 흐른다.


약해져서, 한없이 약해져서 매달리고 만다.


서늘한 입술이 거칠게 닿는 것을 느끼며 드렉슬러는 생각했다.


나는 네 세계와 네 지고함 가운데의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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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