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그리는(상)

사퍼/로라드렉/단편 2015. 6. 13. 10:47



* 그리스 신화 AU : 프로메테우스 로라스 x 제우스 드렉슬러

* 티타노마키아부터 프로메테우스의 결박까지. 포지션만 따왔을 뿐 세부사항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 한울님과 풀었던 썰을 기반으로 합니다









복수를 원했다. 세상은 반역을 원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괴물을 베어 새 왕이 나타나기를 원했다.


그 때 그가 찾아왔다. 이유를 물었다.


 “그대가 승리하기 때문에.”




그가 일러준 모든 말은 옳았고 작은 이들은 폭군을 쓰러뜨렸다. 아버지였던 자를 베어 피를 땅에 뿌리고 패배자들을 영원한 감옥에 가두었다. 쟁취한 산정에 올라 왕이 되었다. 연회가 열리고 모두가 불꽃과 포도주에 여념이 없던 순간이었다.


그를 보았다.


기쁨에 등을 돌린 채, 몸 가득한 동족의 피를 씻지도 쥔 창을 놓지도 않은 채 벌판 가득한 신족의 시신만을 보고 있었다.




그는 경이로운 지혜를 주었다. 매일같이 그를 찾았다. 배움이 빠른 자신을 그는 아껴주었다. 이거 봐, 로라스. 번개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무기로군, 함부로 쓰지 말게나. 차분한 목소리에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해줘, 내가 태어나기 전의 전쟁. 낫이 하늘을 찢은 전쟁. 그는 슬픔이 어린 얼굴로 자신을, 어린 왕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왕은 깨달았다.


그는 늘 슬퍼하고 있었다.




신족은 경배받음으로써 존재하는 이들이었다. 진흙으로 빚은 허약한 이들의 첫 제물을 거두던 때에, 그는 알 수 없게도 가증스러운 속임수를 일러주었다. 왕은 미천한 진흙덩어리에게서 불을 빼앗았다. 산마루 아래는 암흑에 잠겼다. 신을 속인 죄가였다. 그가 가르쳐주었다 할지언정 신을 속이려 든 자체가 용서할 수 없는 죄였으므로. 그러나 그러자 그는 신의 불을 훔쳐내어 인간에게 건네주었다. 세상은 다시 밝아졌고, 왕은 구신족의 도둑질에 조롱당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다. 인적 없는 산중턱 바위에 묶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을,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차라리 죽여달라 애걸할, 용서를 빌며 자비를 구걸할 형벌을. 왕은 사지가 결박된 죄수에게 독수리를 날려보냈다.


독수리가 날개를 접어 앉았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딘가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가 살을 향했다. 드렉슬러는 홀을 움켜쥐었다. 피가 튀며 살이 찢겨나갔다. 여전히 흐르는 신의 피, 움직이는 장기를 헤집어, 독수리는 그의 간을 물어뜯었다. 그는 아무 표정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먼 어딘가를, 그만이 아는 예지의 어딘가를. 드렉슬러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부리가 끄집어내던 산 간의 핏덩이.


순간 드렉슬러는 독수리를 불태워 죽여버리고 싶었다.


눈을 손으로 감싸며 신음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 되고 말았다. 그의 몸에서 피가 흘렀다.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의 손에 의해. 왜, 드렉슬러는 뒤늦게 호소했다. 홀로 왕좌에 쓰러진 채 멀디 멀어 듣지 못할 이에게.


왜 나를 배신했지? 왜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네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줄 수 있었는데. 너를 믿었는데, 대체 왜 배신했지? 왜, 어째서, 나를.


나는 너를 사랑했는데.



 

그를 찾아갔다. 바위산의 황폐와 생간을 파먹히는 고통 속에서도 그는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형벌에 시달리는 쪽은 도리어 드렉슬러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었잖아.”


로라스는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렉슬러는 바짝 다가가 그를 설득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 다시는 날 거역하지 않겠다고. 그 한마디면 돼.”

 “그리고 자네는 다시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겠지. 독수리나 한 마리 더 보내게.”


눈길은 다시 드렉슬러를 버렸다.




그에게 많은 것을 약속했다. 권세, 부귀, 쾌락……그리고 자유. 단 한 마디만, 자신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자신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한 마디만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고 단 한마디조차 해주지 않았다.


어째서. 몇 번일지 모를 거절 뒤에 드렉슬러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대체 무슨 가치가 있어, 그의 몸을, 삶을 전부 내어주려 한단 말인가? 저 아무것도 모르는 미약한 흙덩이가 대체 그에게 무엇이기에?


 ―그 이야기를 해줘. 내가 태어나기 전의 전쟁. 낫이 하늘을 찢은 전쟁.


드렉슬러는 다시 바위산으로 향했다.




로라스는 늘 그렇듯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저 눈길이 자신을 향하는 순간이 기뻤다. 그것은 분명히 증오도 경멸도 아니었으므로. 그의 성품 때문이었으리라 믿었다. 가여웠던 것이다. 그리 믿으려 했다. 그것이어야만 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 아들에서 다시 아들과 아들로 이어지는 영겁 때문은 아니어야 했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세상을 다스릴 수 있지?”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벌써부터 권좌에서 쫓겨나는 게 두려운가?”

 “너는 예지로 우리가 승리하리라는 걸 알았지. 지금 네가 나를 거부하는 것도 내 지배의 종말이 다가오기 때문이냐?”

 “……언젠가는 그대의 시대도 끝나겠지.”

 “웃기지 마. 너는 알고 있잖아. 그래서냐? 그저 승리하는 지배자가 필요했을 뿐이냐? 내가 아니라, 네 머릿속에 든 영원한 전쟁 속의 승리자가 필요했던 거냐고! 로라스, 말해. 어서!”


아니라고 해 줘, 그저 내가 승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특별해서라고, 나였기 때문이라고.


로라스가 고개를 돌렸다. 드렉슬러는 다가갔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말해줘. 내게 와. 그날처럼.


그러나 그는 절망스럽도록 완고했다.


 “언젠가는 자네만이 아니라 자네의 권좌마저도 풍파 속에 잊히는 날이 올 걸세. 그대와 나를 비롯해 모든 신이 경배받지 못하는 시대가 올 거야. 그 날에 누가 남겠나. 자네가 끔찍이 싫어하는 인간들뿐이야.”

 “그래서?”


인간을 샅샅이 찾아내어 마지막 하나까지 불살라버리고 싶었다. 그깟 흙덩이, 그깟 흙덩이가.


 “인간은 지금보다 강하고 현명해져야 해. 우리가 가꾼 땅을 어리석게 소진하지 않도록. 모르겠나? 권좌는 언젠가 사라져버려. 권좌를 차지하려 해도 권좌 자체가 없을 날이 온단 말일세. 그건 내 예지로도 막을 수 없어.”

 “그래서 저 약해빠지고 불손한 것들에게 신의 힘을 주겠다?”

 “잊었나? 내 신족에게 자네의 신족은 약하고 불손한 이들이었어.”


그는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왕좌, 드렉슬러는 절규했다. 그에게 자신은 결국 저 흙덩이만큼의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겼어, 내가 지배자라고! 내 지배를 거부하는 건 너뿐이야!”

 “그래, 내 도움으로.”

 “로라스!”


차라리 말하지 마. 내가 네 도구에 불과했다고는…….


 “그대가 승리할 것을 알았어. 나는 그것이 싫었지. 자네를 찾아가면서도, 오만하기 그지없는 눈을 바라보며 내 핏줄을 살해할 계책을 알려주면서도,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어 나의 혈족이 영원한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면서도.”

 “뭐야, 처음부터 날 증오했다고 말하기라도 할 셈이냐?”

 “예지가 닿지 않는 영역이 있더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워. 풀어줄게, 내게 거역하지 않는다고만 말해. 세상이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까, 내게. 로라스.”

 “포기하게. 나는 저들을 버릴 수가 없어.”


비참에 빠져 소리쳤다. 이리 애원하는데도, 대체 나는 네게 얼마나 무가치하기에.


 “그깟 인간 몇 번이고 다시 만들 수 있어! 대체 왜!”


그는 웃었다.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한다는 듯이.


 “나는 자네에게 조력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신족으로서도 불가항력인 일이 있더군. 이를테면……그래, 그대를 사랑하는 것처럼.”


드렉슬러는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 그 안에 비친 절망과,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는 기쁨과, 거울처럼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보았다.




오래도록 그를 찾지 않았다.


그를 사랑했다. 그가 언제나처럼 예지의 사이를 바라보며 피흘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두려웠다.


그에게는 예지가 모든 가치보다, 스스로보다 중했다. 그는 드렉슬러를 돕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드렉슬러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드렉슬러를 왕으로 만들었고, 드렉슬러를 배신했다. 예지한 미래가 그리해야 한다 가리켰으므로.


로라스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러나 언제고, 예지가 드렉슬러를 버린다면 그는 다시 배반할 터였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있더라도, 반드시.


독수리의 부리가 그의 간을 끄집어내 찢는 것을 보았다. 수천 번을 본 광경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지도 몸을 비틀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배반할 것이다.


반드시.





미래는 바꿀 수 없는 화첩이었다. 미래의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그곳에 도달해야만 했다. 모두들 원하는 바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건만, 자신은 미래의 언젠가에 그려진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도구에게 삶이란 사치스러웠다.


혈족을 학살할 자에게 충성을 약속하고, 그자를 배반해 먼 이야기의 존재로 만들어갔다. 수천 년이 지나면, 그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채 바위가 그렇듯 그저 영원히 존재할 뿐인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될 터였다. 미래는 늘 그리 이치가 맞아떨어지는 아름다운 화폭이었다.


그러나 그 화폭 어디에도, 자신이 그 젊은 폭군을, 혈족의 피를 묻히고 오만하게 자신을 하대하는 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장면은 없었다.


그 총명함과 생동하는 혈기에 빠져, 그를 배반해야 하는 순간 어떤 고통에 사로잡혔는지, 그가 자신에게 반역자라 소리칠 때 얼마나 이 감정을 토로하고 싶었는지, 그가 직접 내린 형벌의 억겁 동안 그가 찾아올 때마다 그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위안이었는지, 그 고통을 일러주는 예지는 없었다.


그렇기에 로라스에게 그 사랑은 어떤 의무보다도 소중했다. 자신만의 것, 태어나 처음으로, 명령받지 않아 갖게 된 것.


사랑을 털어놓았다. 그는 상처입은 얼굴로 돌아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 않았다면 그는 계속해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로라스는 말했다. 왕을 사랑한다고. 섭리 때문도 그것이 미래여서도 아니고, 그저 그리 말하고 싶었기에.


그를 사랑하는 동안 로라스는 자유로웠다. 로라스는 처음으로 신이었고, 스스로였다.


얼마가 지났는지 세어보지 않았다. 백 년? 오백 년? 그가 서 있었다. 드렉슬러, 로라스의 왕, 로라스가 배반한 신, 로라스가 사랑하는 이.


독수리가 날아왔다. 드렉슬러는 새를 불러들였다. 커다란 날개가 주인의 손등을 쓸었다. 그는 잠시 독수리를 내려다보더니 망설임없이 목을 비틀었다. 투둑 소리와 함께 부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왕의 의복은 순식간에 핏물이 들었다. 그는 사체를 버렸다.


발이 천천히 로라스를 향해 다가왔다.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가 슬퍼 보였기에, 로라스는 안타까웠다.


순간 드렉슬러는 무릎을 꿇었다. 로라스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결박되어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로라스의 발목에 걸린 족쇄를 풀어주었다. 몇백 년을 묶인 채 비틀린 발목을 어루만졌다. 손길이 닿는 순간 느낀 것은 고통보다는 쾌락이었다. 드렉슬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목의 족쇄도 풀어주었다. 손목, 어깨, 간을 파이던 옆구리까지 그는 조심스럽게 만져주었다. 눈을 감았다.


 “올라가자. 내 곁에 있어줘.”


가증스러웠다. 자신은 그의 시대도 끝나리라고 말했다. 감정에 호소하는 터일 테지. 로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의 궁전에는 어울리지 않아. 알고 있잖나.”

 “왕은 나야. 누구도 네게 함부로 대하게 하지 않아.”

 “그대보다 큰 고통을 내게 준 이가 있겠나?”


그는 상처입은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네가 저지른 짓은 반역이었어! 난 방법이 없었다고!”

 “알고 있네. 그러니 반역자이자 죄지은 신족인 나를 그대의 신성한 궁에 들일 생각은 그만두게나.”

 “도대체 네 고집은……!”


산을 내려가려면 한참이 걸리겠지. 로라스는 바싹 다가선 드렉슬러를 바라보았다. 손도 발도 자유로웠지만 아직 말을 듣지 않았다. 그와 입을 맞추는 것은 어떤 쾌락일까. 로라스는 알지 못하는 일이 생겨남이 즐거웠다. 그의 가증에 대고 요구했다.


 “다만,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하지.”

 “뭐든 들어줄게, 올라가자. 로라스.”

 “올라가지는 않아, 그저 그대가 곧잘 하는 거짓말 한 마디만 해주게.”

 “거짓말?”


로라스는 그저 들어보고 싶었다.


 “그대 앞의 반역자를, 나를 사랑한다고.”


비록 거짓일지라도,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로 듣는 밀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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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