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 오만한 구도자(상)

커미션 2015. 6. 2. 08:12


* solz님의 커미션

* 2차 능력자 전쟁 이후 아틀란티코 드라군의 처분에 대한 로라스의 대응

* 5000자/15000자








알베르토 로라스는 지치고 피흘리며 불에 옷이 타버린 지하연합의 능력자들을 바라보았다. 제 뒤의 능력자들, 헬리오스 법인의 사람은 속속 늘고 있었다. 그들은 셋뿐이었다. 두 명의 어린애와 그림자를 타는 여자.


홀든의 둘째가 베어버리겠다며 나섰다. 로라스는 가로막았다. 산정을 둘러싼 능력자들은 세 명 정도는 눈 깜박할 사이에 죽일 수 있을 만큼 많았다. 무엇보다 회사의 리더인 명왕이 오고 있었다. 그들은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었다.


무엇이 이유인지는 몰랐다. 그것은 국가 간의 전쟁보다도 적나라한 싸움이었다. 명령받았기 때문에 살해했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찔렀다.


사람을 물렸다. 어차피 셋뿐이라면 전력으로 싸워도 한 시간이면 끝날 것이다. 그나마도 한 명은 전투원이 아니었다. 소년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빠드득 하고 가죽장갑이 비틀리는 소리가 났다. 저 자가 루이스인가. 호기심이 일었다. 어디 한 번 보여주게.


얼음의 강도는 얼핏 보기에도 약했다. 팔을 둘러싸 검처럼 만든 결정 덩어리는 한 번 후려치자 부서져버렸다. 자신에게 총알을 맞혀보려는 시도는 어리석었다. 날아오는 얼음덩어리에 창을 내지르자 결정은 반쯤 녹은 물처럼 떨어졌다. 결정사의 팔꿈치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로라스는 한 번도 그의 살갗에 창을 찔러넣지 않았다. 로라스는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스가 달려들었다. 조금도 닿지 않았다.


얼음의 궤적을 따라 흩뿌려지는 것은 루이스의 피였다. 로라스는 이따금 정면으로 날아오는 얼음덩어리를 부수거나 그의 얼어붙은 팔을 쳐낼 뿐이었다. 더 있다고 들었다. 자신이 능력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 할, 평범한 결정사들과는 다른, 벨져 홀든마저 패배하게 만든 무언가가.


피 흘리는 팔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갔고, 한눈에 보기에도 호흡이 거칠었다. 루이스는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패배는 곧 죽음이었으므로, 가진 모든 솜씨를 다해 결투에 임하고 있었다. 결투. 로라스는 그의 무릎단까지 흠뻑 적신 피를 보며 곱씹었다. 결투.


이것이 결투인가?


루이스는 다시 허공을 갈랐다. 총탄도 피할 수 있는 육신으로 지친 소년의 주먹질을 피하는 행위는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건 흡사……희롱이 아닌가.


죽어가는 인간을 둘러싸고, 아무 의미도 없는 싸움에 던져넣어 탈진해 죽게 만드는 것?


차라리 죽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로라스는 창을 추켜세웠다. 루이스가 간신히 고개를 쳐들었다. 투견처럼 죽어가는 몸에 의지만이 이글거렸다. 살의가 아니었다. 아쉽군. 로라스는 조금 웃었다.


창을 던져버렸다. 소년이 당황하며 물러섰다. 빈 손으로 외쳤다.


 “내 패배다. 보내주지.”


알베르토 로라스는 처음으로 꺾였다.




***




로라스는 자신을 둘러싼 모순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기사였다. 사람들은 그를 기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가 속한 단체는, 그를 기사라 불리게 만들어준 단체는 아틀란티코 드라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드라군, 용기병, 소총을 든 경기병. 검이 아니라 총을, 화약을 사용하는 사냥꾼.


개인화기의 등장은 말을 탄 과거의 기사를 몰락케 했다. 중갑을 둘러싼 기사의 돌파력은 총포 앞에 허무하게 쓰러졌다. 드라군은 머스킷을 들고 전장에 서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전장에 도착해, 아직도 구시대의 영광에 집착하는 귀족을 쏘아 사살했으며, 사라질 영광을 바라며 쌓아올린 성채에 포를 쏘아 무너뜨렸다. 그렇게 중세는 끝났다. 기사와 음유시인의 시대, 방랑하는 영웅이 사랑과 신앙을 찾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드라군은 다시, 더욱 추악한 전장에서 무너졌다. 참호와 기관단총의 등장이었다.


기병은 더 이상 전장에 다가갈 수 없었다. 머스킷은 이제 기관단총과 자동소총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말은 참호 안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구덩이 안에 웅크려 썩어가는 습기를 피하려 애쓰며, 돌격이 아니라 질척한 포복을 해야만 하는 전쟁이 드라군을 집어삼켰다. 드라군 또한 슈발리에가, 나이트가 그랬듯 과거의 영광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로라스는 기사였다. 그는 아틀란티코 드라군이었으며, 에스파냐 왕국의 귀족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타지도, 소총을 들지도, 누군가가 세상에서 맡는 역할이 끝났다고 선고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기사였다. 로라스는 그를 위해 만들어진 갑옷을 입었고, 그의 완력을 견뎌내도록 개량된 창을 들었고, 왕실과 헬리오스 재단을 따랐다. 왕실과 헬리오스는 그의 능력을 더 큰 이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고 권했고, 로라스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다. 그의 세계는 착실히 넓어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검은 불길이 지옥처럼 솟구치는 산정에서, 명왕은 모든 것이 오해였다고 선언했다. 재스퍼는 달아났다. 루이스는 정신을 잃었고, 명왕은 흑염의 딸에게 사과했다. 치유 능력자들이 명왕의 명령에 따라 세 명의 연합 능력자들을 옮겼다. 로라스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소년을 바라보았다.


오해였다고?


그저 오해로 일어난 전쟁이라고? 무엇을 오해했단 말인가? 무엇을 보상한단 말인가?


끊어온 목숨이, 짓밟은 삶이, 그저 오해 때문에 사라진 것이었다고?


로라스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징계에 회부되었다.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라스가 루이스를 살해했다면 연합과의 관계는 더욱 곤란해졌을 터이기에, 그는 몇 가지 숫자만을 가지고 회의실을 나올 수 있었다. 일시적 등급 강등, 감봉, 근무조건 조정, 회사측에서 제공하던 몇 가지 편의의 중단. 로라스에게는 중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등급 조정만이 젊은 자존심을 건드렸으나, 목숨을 살린 대가로는 충분하다고 털어냈다. 항구적 강등이 아니라면 다시 에이스 등급으로 올라서는 것쯤 어렵지 않았다.


경무장을 하고 연무장에 나섰다. 조용한 연무장 한가운데에서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단단히 대지를 딛고 서, 사력을 다해 팔을 내질렀다. 정확한 위치에서 멈춘 팔에서 돌아오는 반동이 만족스러웠다. 묵직한 창의 무게, 몸의 기울기, 버텨내는 각력의 한계. 그것을 시험한 지 지나치게 오래되었다. 연무장의 나무토막은 로라스의 힘을 버텨내지 못했다.


창을 돌려 쥐었다. 순간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이야, 제법인데.”


로라스는 쳐낸 창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발등으로 쳐 붙들었다. 덮개가 둥글고 끝이 원뿔이 아니라 검날의 형상을 한 장창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평복 차림의 동료가 연무장에 발을 내디뎠다.


 “꽤 힘줘서 던졌는데.”

 “그런가? 잘 모르겠더군.”


다리오 드렉슬러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로라스는 그의 창을 던져주었다. 다음 순간 날카로운 날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로라스가 서 있던 자리에 깊은 구덩이가 파였다. 아슬했다. 로라스는 그의 정면에 창을 내질러 갚아주었다. 허공에서 파열음이 났다. 그는 훌쩍 물러나 웃더니 그대로 쥔 창을 집어던졌다. 번득이는 날이 로라스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쿵, 로라스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도약했다. 그가 자신이 있던 자리를 가르고 있었다. 반동으로부터 몸을 세운 드렉슬러가 소리쳤다.


 “격추시켜 달란 거냐?”

 “으스러지지 않게 피하는 게 좋을 텐데.”


로라스는 그의 몸짓을 가늠해 강하했다. 창은 그의 발꿈치 바로 뒤에 굉음을 내며 박혔다. 아쉽군, 발 뒤로 파이는 구덩이에 그가 휘청하는 사이 로라스는 바로 창을 휘둘렀다. 처음으로 금속이 마찰하는 특유의 고음이 울렸다. 맞붙은 창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비아냥거렸다.


 “뒤에서 베는 건 치사하지 않냐?”

 “한눈을 판 자네 잘못이지.”


로라스는 더욱 힘을 주었다. 팽팽히 당겨오는 근육의 움직임, 밀려날 듯 밀려나지 않는 대치의 긴장감, 금속의 절규하는 마찰음, 오랜만이군. 끼긱거리며 상대의 창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순간 창이 크게 미끄러지며 몸이 굴렀다. 로라스는 본능적으로 크게 뛰었다. 파악, 흙먼지가 사그라지며 그가 몸을 돌렸다. 창이 날아들었다.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 마음먹었건만, 이번에는 어디에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연무장 한구석에 깊이 박힌 창을 뽑아내려는 순간,


 “멍청한 놈.”


턱을 걷어차였다. 그가 몸을 낮추며 내려앉았다. 공중에? 자신이 알기로 그는 그렇게 오래 체공할 수 없었다. 그는 로라스의 얼빠진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한바탕 웃고는, 로라스의 뒤를 가리켰다.


 “머리 나쁜 건 낫질 않네. 병 아니냐?”


연무장의 뒤에 높은 시계탑이 있었다. 로라스도 웃고 말았다. 그는 스스로 창을 뽑아냈다.


 “힘은 더 무식해졌구만.”

 “자네는 빨라졌더군.”

 “네 창이 무거워서 그래.”

 “그런가?”


로라스는 자신의 창을 들어보았다. 익숙한 무게였다. 강철은 확실히 가벼운 금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인이 무구의 무게에 연연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드렉슬러는 자신의 창을 건네주었다. 들어봐. 로라스는 아까도 들어보았는데, 같은 생각을 하며 건네받았다. 그러곤 다음 순간 중얼거리고 말았다.


 “……다르군.”


의식하자 무게의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반절이 조금 더 되었다. 이 정도 무게라면 더욱 오래 체공할 수 있었다. 더 오래 싸울 수 있었다. 그가 직접 만든 것이 분명했다. 고국에 있을 적부터 신기한 물건을 만드는 재주가 있는 벗이었다. 로라스는 진심으로 경탄하며 돌려주었다.


 “대단하군. 훌륭해. 부러울 정도야.”

 “그래?”


그는 붉은 머리칼을 긁적였다. 제 창을 쥐고 몇 번 흔들다, 그는 별안간 로라스에게 물었다.


 “너도 만들어줄까?”


로라스는 뜻밖의 호의에 당황했으나, 이를 거절했다가는 그가 크게 실망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로라스의 창을 빼앗아 사라졌다. 좋은 작품이 나오겠지. 로라스는 골목길 어귀에 덩그러니 남은 채 웃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트와일라잇, 그림자 속의 도시를 여자는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


어렴풋이 로라스를 감싸는 사념들이 있었다. 로라스는 그것들을 밀어두려 했다. 번민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로라스에게는 늘 시간이 부족했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이 그의 역량보다 많았다. 지워진 의무가 옳다고 믿었기에 받아들였다. 로라스는 구세주를 경외했다. 고결한 피로써 세상의 죄를 대신 갚은 사람의 아들. 그를 믿는 이들이 따르는 길을 향했다. 그 길은 늘 옳았고, 로라스는 흔들림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의 손으로 지키지 못하는 이는 그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 뿐이었다. 끊임없이 단련했다. 모든 죄를 징벌하고, 모든 슬픔을 목도하고, 모든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사념이 울부짖었다. 로라스는 듣지 않고자 했다.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직인은 아틀란티코 드라군의 것이었다. 로라스는 말없이 봉투를 뜯었다. 전언은 짧았다.


왕실과 아틀란티코 드라군의 명예를 실추시킨 알베르토 로라스의 처분을 위해 10월 1일까지 마드리드의 기사단저로 출두할 것을 명령한다.


사념이 울부짖었다.


어리석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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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