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 오만한 구도자(하)

커미션 2015. 6. 3. 23:27



* solz님의 커미션

* 2차 능력자 전쟁 이후 아틀란티코 드라군의 처분에 대한 로라스의 대응

* 15000자/15000자









영국인들은 이곳을 감옥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토굴? 로라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입가가 경련하듯 움직인 것이 전부였다. 날을 세기에는 창이 없어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고, 기도를 올리기엔 음식 찌꺼기와 고인 습기가 썩어가는 공기가 너무 탁했으며, 생각을 정리하기엔 수시로 엄습해오는 통증과 어둠 속을 지나는 작은 것들이 거슬렸다.


로라스는 이곳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으나 자신이 이곳에 수용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는 고통이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불편과 불결에는 무지했다. 견디는 일과 불쾌한 감정은 별개였다.


전장에서 흙탕을 헤치고 나무뿌리를 베고 자는 불편은 목적이 있었다. 비록 로라스는 그런 전장을 겪어보지 않았으나. 그러나 로라스는 그저 갇혀 있었다. 그를 기사로서 고르고 성장시킨 드라군에 의하여. 명예를 저버렸다는, 로라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마드리드의 기사단저에 도착했다. 로라스는 그 바로크풍의 건물이 교회를 닮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암막을 씌워 놓은 회랑은 초가 아니라 전기로 불을 밝혔다. 기사단장과 왕실의 예무관, 홍보관이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로라스는 경례를 붙였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의 궁정식 스페인어였다. 그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다만 한가지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아이거 산에서 지하연합 소속의 부상당한 하급 능력자에게 패배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변명할 생각은 없었고,


 “사실입니다.”


그것이 끝이었다.


로라스는 손톱 밑에 거뭇하게 들러붙은 때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늘 하인들이 가져다주는 맑은 물과 다림질된 옷가지, 기름을 치고 깨끗하게 닦은 무구에 익숙했다. 식사를 거르면 제일 먼저 근육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들은 로라스를 감금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굶주린다는 감각은 아직 절박하기보다는 수치스러웠다. 며칠에 한 번 매번 다른 사람이 와 돌처럼 딱딱한 빵 한두 조각을 놓고 갔기 때문이었다머리칼이 턱을 넘겨 늘어지고 있었다. 멋대로 눌리고 뭉친 머리칼이 눈을 찌를 때도 있었다. 뜯어내 보려 손을 들어올리다 족쇄에 걸렸다. 부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평범한 철이었다. 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간수가 찾아왔다. 로라스는 이곳에 간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중년의 사내는 비가 올 적에나 찾을 만한 장화를 신고 누군가를 안내해 로라스의 옥 앞으로 데려왔다. 인영만으로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무릎을 꿇었다. 더러운 물이 옷자락에 스몄다.


 “아버님.”


그는 옥의 모양새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똑바로 로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수치스럽구나.”


로라스는 손을 그러쥐었다.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변명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저는 명예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 가르치고 가르쳤건만……이리 아둔해서야.”

 “……아버님.”


들어주십시오. 목소리는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패배했다. 그러나 명예를 위해서였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오만과 긍지는 다르다고.”

 “오만……이라니…….”

 “아직 젊어 그러한 줄 알았는데, 아니로구나. 어리석은 혈육까지 챙기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알아서 해보거라.”

 “아버님, 잠시만……!”


인영은 곧 사라졌다. 철문이 닫히고 자물쇠 소리가 났다. 로라스는 다시 어둠 속에 남겨졌다. 바짓단은 더러운 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으스러지게 쥔 손이 얼얼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오만? 알베르토 로라스가, 오만이라고? 그리 말하신 것인가?


아둔하고 오만해 수치스러운……어리석은 아들.


어리석은.


죄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잡아야 했다. 잡아,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이 무의미한 감금이 명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이었단 말인가?


자신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릇된 길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파편이 된 사고와 함께 혼란이 덮쳤다. 벽돌 하나 제대로 세우지 않은 토굴처럼 로라스를 암흑 속에 가두었다. 그 속에서, 지쳐가는 몸으로, 생각을 하려 애썼다. 마시지 못한 입술이 찢어졌다. 이명이 울리는 가운데 기억이 제멋대로 뒤섞였다. 더러운 어둠 귀퉁이가 불러내는 기억은 극단적이었다.


처음 아버지의 뒤를 따라 성당에 들어설 때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빛, 각력으로 그 성당의 십자 첨탑보다 높이 뛰어오를 수 있게 되었던 날 시야의 끝까지 펼쳐지던 도시의 풍경, 헬리오스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탔을 때 뱃머리에서 부서지던 물살과 빛무리. 찬란함, 고결함, 희망.


어두운 런던의 뒷골목에서 가짜 앤지 헌트를 살해할 때의 담 그림자, 스위스로 가는 기차가 터널을 지날 적의 긴긴 어둠, 루이스가 흘린 피를 흙과 함께 집어삼키며 타오르던 검은 불꽃.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도 그곳에 있지 않았다. 그 희롱을, 투우보다 잔인한 유흥을 보지 못했다. 왕실도 드라군도, 아버지도 로라스가 왜 창을 내던져야 했는지 몰랐다. 그것은 투우가 아니었다. 고대의 야만적 형벌에 더 가까웠다. 사자를 맨손으로 상대케 하며 열광하는. 로라스는 그런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싸움을 하기 위해 정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모르실 뿐이다, 로라스는 이를 악물었다.


어찌 해야 했단 말인가. 그 무력한 소년을 죽이라고? 회사의 총력을 모아, 고작 지치고 상처입은 능력자 세 명을 살해하는 것이 그 전쟁의 목표였다고? 죽여서, 죽이고 나면 대체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회사의 완전한 지배? 헬리오스는 국가도 사상도 아니었다. 무엇도 유일할 수는 없었다. 신을 제외하고는.


더구나 오해라지 않았는가. 오해, 그 피를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로라스에게는 너무도 놀라웠다. 무엇을 오해했단 말인가? 헬리오스 작전대기실에서 로라스는 분명히 들었다. 연합이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는 틈을 타 회사의 주도권을 확실히 다진다. 재기하지 못하도록 차기 수장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앤지 헌트를 제거한다. 로라스는 그 자리에서 앤지 헌트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녀는 결정사와 같은 나이였고, 그때까지는 능력자가 아니었다. 회사는 여섯의 앤지 헌트를 쫓아 그 중 셋을 제거했다. 반항하는 연합 능력자 다수를 죽였다. 연합은 회사와 같은 수직체계가 아닌 수평조직이었으므로 정보의 전달이 느렸고, 쉽게 와해되어갔다. 전쟁이라는 표현은 너무 온건했다.


그 피가, 그 학살이 오해였다고 한다. 무엇이? 회사가 연합을 무너뜨리고 주도권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했다는 것이? 무엇이? 로라스는 위험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구석에 몰린 육신과 피로한 정신이 기어코 그것을 끄집어냈다.


로라스는 산정에 서 있었다. 그 작전을 듣고, 작전을 수행하고, 마지막……살인을 위해.


그러려던 것이 아니다.


로라스는 모두 들었다. 주도권을 위해서라고, 앤지 헌트라는 아무 능력도 없는 민간인을 살해할 계획이라고, 그런 일에 로라스의 힘을 쓰겠다고.


그러려던 것이 아니다.


로라스는 돌아서지 않았다. 지시받은 대로 죽이고 산정을 올랐다.


어찌.


산정 가득한 관중, 단 둘뿐인 그럴싸한 유희.


어찌 이리도,


창을 내던지며, 마치 구원이라도 내리는 양.


어리석은.


산정 가득한 관중이 학살자로 돌변해 쏟아지는 순간에 그들을 구할 힘도 없었으면서.


아, 로라스는 무릎꿇었다.


이런 뜻이셨습니까.


무릎을 쥐어뜯다시피하며 고꾸라졌다. 명예가 아닌 명성이, 관용이 아닌 허영이, 이상이 아닌 야망이 로라스를 사로잡고 있었다. 어찌 이럴 수가, 그는 탄식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 아, 신이시여. 로라스는 죄를 토로했다. 오만을, 대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악을.


저는 감히 신이 되려 했습니다.


단죄는 불꽃과 함께 찾아왔다.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함께 충격이 덮쳤다. 로라스는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었고, 폭발의 여파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파편 같은 것이 살갗을 때렸다. 기침을 하자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눈은 여전히 뜰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난데없는 빛 때문이었다. 너무 밝아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눈이 지나치게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삐익거리는 이명이 가라앉고, 흐릿하게 사물을 식별할 수 있게 될 때쯤, 로라스는 이것이 징벌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오, 냄새. 너 옷 썩은 거 아냐? 살아있긴 한 모양인데 왜 말을 못하지?”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턱을 틀어쥐고 입을 벌려보려 했기 때문에, 로라스는 간신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드렉슬러……?”

 “혓바닥 멀쩡하네?”

 “여기엔…….”

 “무단결근하다 너 봉급 아예 안 나올까봐.”


창 값 받아야 하거든. 드렉슬러는 일어서며 로라스의 족쇄를 잘라냈다. 쓸린 상처가 피와 선명히 엉겨 있었다.


 “얼마나 지났지……?”

 “네 달. 이야, 밥도 안 줬나 보네. 마른 거 봐라.”


네 달, 네 달이라. 로라스는 가늠이 가지 않았다. 눈을 깜박였다. 완파된 천장과 격벽 사이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드렉슬러는 완전무장을 하고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그의 창을, 왼손에는 낯선 창을 들고. 그가 몸을 돌려 왼손에 든 창을 던져주었다. 얼결에 받아드는 로라스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몰골이 그래갖고 쓸 수 있겠냐?”

 “쓰다니…….”


드렉슬러는 별 한심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로라스를 쳐다보았다.


 “도망가야지. 평생 여기 있을 거냐?”

 “도망?”

 “전문용어로 얘기해줘? 탈옥하자고. 빨리 창 제대로 잡아.”


로라스는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쓸데없는 소리 하면 죽이고 갈 거다. 난 여기선 내 몸 지키는 이상은 못 해.”


경비병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곧 드라군도 도착할 것이다. 드렉슬러는 여전히 창을 들고 매섭게 로라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심인 것이 분명했다. 내 몸. 한 사람의 몫……사람의 능력, 사람의 힘. 로라스는 웃어버렸다. 마른 입가가 찢겼다. 쿨럭임에 검은 피가 묻어나왔다.


 “미쳤냐?”

 “아니, 가지.”


로라스는 창을 틀어쥐었다. 이 무게가 닿는 거리까지. 이 육신이 다다르는 한계까지. 감히 할 수 있다 믿지 않겠으되, 단지 바라겠나이다.


도약했다. 휘감아오는 공기는 너무도 상쾌하고 달콤했고, 시야는 아름다웠으며 육신은 한껏 빛을 받고 있었다. 자비와 용서와 가호를. 로라스는 다시 기도할 수 있었다.








찻물이 끓어버렸다. 로라스는 주전자를 내려 헝겊으로 덮어놓았다. 드렉슬러는 여전히 정을 들고 철판을 긁고 있었다. 문양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그리도 혐오하는 비효율에 매진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안목이 자신보다는 나았으므로 로라스는 놓아두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편지였다. 로라스는 겉봉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틀란티코 드라군, 그러나 국장이 도안에서 빠져 있었다. 익숙한 왕실의 문장, 네 중세 공국을 새긴 방패 위에 얹힌 왕관의 형상이 없었다. 가만히 선 로라스가 이상했는지 드렉슬러가 다가왔다. 그는 로라스가 감추기도 전에 봉투를 쑥 뽑아 들었다.


 “대단하구만. 망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왕실 같은 건 모릅니다 하는 거냐?”


1931년 4월 스페인 복고왕정은 무너졌다. 스페인은 이제 공화국이었다. 로라스와 드렉슬러가 마드리드에서 탈출해 산 세바스티안에서 배를 타고 리버풀에 도착한 뒤로 꼬박 일 년 하고 반 만이었다. 왕실 자금으로 운영되던 아틀란티코 드라군은 순식간에 지지기반을 잃었다.


드렉슬러는 반듯하게 접힌 서한을 펼치자마자 폭소했다. 하도 웃어 서한을 놓쳤을 정도였다. 로라스는 그것을 받아 읽어보았다.


아틀란티코 드라군은 행동강령 2조 15항에 따라 무질서한 행위로 드라군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큰 피해를 입혔던 알베르토 로라스와 다리오 드렉슬러의 복권을 특별히 허락한다.


따라서 두 사람은 다음의 조항을 이행할 의무가 있으며……


로라스는 서한을 덮어버렸다. 회사의 자금을 원하는군. 로라스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드렉슬러가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제명됐었지?”

 “모르겠군. 바빠서.”


드렉슬러는 유쾌하게 웃었다. 로라스는 정말로 바빴다. 우선 눈앞의 소중한 이에게 차를 따라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정말로 늘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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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아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