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 오만한 구도자(중)

커미션 2015. 6. 2. 22:50



* solz님의 커미션

* 2차 능력자 전쟁 이후 아틀란티코 드라군의 처분에 대한 로라스의 대응

* 10000자/15000자







드렉슬러는 로라스의 창을 공방으로 가져와 밀랍으로 조형을 떴다. 그는 드렉슬러의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친우이자 조언자였으므로, 아무리 강화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허락없이 무구를 분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흘긋 보기에도 구조가 짐작되는 단순한 마창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원뿔 모양으로 담금질된 하나의 판금을 굵직한 철봉이 받치고 있었다. 보기보다 무게가 나가는 것은 충격을 견디기 위해 가운데를 두껍게 만들었기 때문일 터였다.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했다. 자신과는 다른, 그의 방식에 맞도록.


자신의 창은 재질이 허락하는 한 가볍고 길게 다듬어져 있었다. 평형을 맞추고 장거리를 거침없이 날아가도록. 먼 거리를 가르고도 목표물을 확실히, 완전하게 꿰뚫도록. 그만큼 드라군 식의 후려치기나 찌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드렉슬러는 그것을 창의 상단부를 양날검으로 교체함으로써 보완했다. 요컨대, 드렉슬러의 창은 정교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밀랍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연무장에서의 대련이 떠올랐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그대로 버티려 들었다면 창이 부러지거나 드렉슬러의 팔이 날아갔을 것이 분명했다. 체력이 절정에 이를 시기라고는 하지만, 로라스의 창은 터무니없었다. 이런 고철덩어리를 들고도.


새 창이 필요했다. 그 힘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수 있게 도와줄.


합금의 배율을 조절했다. 강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충격에 오래 버티면서 반동을 이겨내야 했고, 순간적인 타격과 급격한 온도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아야 했다. 연무장에서는 장난스레 흙먼지만을 일으켰지만, 진짜 전장에서 그는 문자 그대로 섬광을 일으키며 강하했다. 충돌하는 순간의 충격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드렉슬러는 합금 열몇 가지를 박살내고서야 만족스러운 배합을 찾아냈다.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합금이 구릿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넣지도 않은 구리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드렉슬러는 효율만큼이나 외양도 중시했다. 고릿적 늙은이들처럼 미늘갑옷을 늘어뜨리느니 비무장으로 전선에 나서는 게 나았다. 그리고 구릿빛 마창은 드렉슬러의 심미안에는 실격이었다. 하지만 합금은 완벽했다. 이 금속이어야만 했다.


드렉슬러는 일단 창의 본체를 만들어보았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끄트머리는 밀 한 톨 얹을 수 없을 때까지 다듬었음에도 무뎌지지 않았다. 이 배율이 맞았다. 이걸 어쩐다. 드렉슬러는 밀랍으로 만든 조형과, 공방 한구석에 세워둔 로라스의 창을 건너다보았다. 그는 얼마 전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드라군에서 소환장을 받았다면서.


드라군, 정신나간 기사놀음. 드렉슬러는 턱을 괴고 덜떨어진 고국의 시대착오에 대해 생각했다.


기사도가 있었다면 로망스는 기사도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결한 사랑이 있었다면 로망스는 연인을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낭만은 중세가 저물어가는 타락한 저녁이 곱씹는 추억이었다. 윤색하고 날조한, 골방에 틀어박혀 흑사병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지워내던 비열함과 음탕함의 은폐.


로라스와 드렉슬러의 고국은 도무지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이 진군하던 때에 스페인은 종교재판을 벌이고 있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산 사람을 불에 태웠다. 철도가 놓이고 공장의 연기가 하늘을 메우는 시절이 와도 스페인은 농부들의 나라였고, 사제와 귀족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왕실은 새 세기가 밝아올 때에 기사단을 만들었다. 하필 스페인에서 난 귀족이었던 드렉슬러도 그 시대착오에 발을 담가야만 했다.


언젠가 미친 기사가, 아니지……기사란 원래 그렇지. 그래, 주군의 등에 칼을 꽂고 왕실을 유린할 진짜 기사가 이 안에 있을까. 드렉슬러는 이따금 불온한 호기심에 또래 가득한 홀 안을 둘러보곤 했다. 진짜 기사는 왕실을 베어버리고, 미친 기사는……그래, 죽겠지. 세르반테스처럼.


드렉슬러는 낡은 이야기의 노망난 기사가 스페인의 구세주라고 생각했다. 비유? 신학도 문학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라 만차의 돈 키호테. 기사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시절에 창을 들고 나선 우스꽝스러운 시대착오. 하지만, 경건하신 이베리아의 수백만 신도가 기도하는 대로 그리스도가 천 년 하고도 육백 년이 지나 광신이 몰아치는 에스파냐에 내려왔다면 어땠을까. 순진한 신의 아들은 가식과 고난을 구분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모든 슬픔을 도우려 했을 테고, 기적을 일으켜 괴로워하는 양떼를 구하고, 그러곤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다시 못박혀 죽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사가들은 눈앞의 칼이 두려워 구세주를 미치광이라 적고, 세상은 다시 사제와 귀족이 지배하는 평화로 돌아가는, 노망난 늙은이의 노래.


드렉슬러는 기사놀음을 하고 있었다. 왕실은 둘 중 어느 쪽도 바라지 않을 것이므로.


기사놀음이라.


로라스의 창을 바라보았다. 고국에서 마지막으로 참가한 마창시합이 떠올랐다. 살상을 막기 위해 얇은 철판 안에 나무로 된 날을 끼워넣은 장난감 같은 창.


후스트……그래, 그놈은 그런 걸 좋아할 테니.


드렉슬러는 몸을 일으켰다. 경도와 탄성을 끌어올린 은빛 합금을 녹이기 시작했다. 금속이 녹아 섞이는 동안 거푸집을 만들었다. 무게를 계산해 손잡이의 길이를 결정했다. 창의 구릿빛 몸체를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원추형의 몸체에 모서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은빛 판금 여섯 장은 얇지만 흠집과 충격에 강했다. 드렉슬러는 그것을 구릿빛의 몸체에 단단히 둘러 붙였다. 돋을새김과 상감으로 장식한 하단부 밑으로 두 조각으로 이어붙인 손잡이를 댔다. 드렉슬러는 창을 쥐어보았다. 원래 무게의 7할 정도 되는 듯했다. 강도는 훨씬 뛰어났고, 내구성도 문제없었다. 은빛의 판금이 감싼 안에서 가늘고 위력적으로 뻗은 구릿빛 날은 언뜻 보면 목재 같았다. 알베르토 로라스 같은 인간이 즐길, 마창시합의 랜스처럼. 드렉슬러는 만족했다.


본디의 투박한 고철덩어리 옆에 세워놓고 보니 새 창은 더 날카롭고 매끈했다. 날이 상하지 않도록 걸어놓았다. 돌아올 녀석의 표정이 궁금했다. 시험해보겠다고 연무장을 박살내버리면 곤란한데. 그러고 보니 감봉 처분을 받지 않았던가?


재미있는 볼거리였을 것 같은데. 드렉슬러는 여기저기 흩어진 메모를 모으며 중얼거렸다. 그날, 로라스가 연합의 어린아이에게 패배를 선언하던 순간, 드렉슬러는 산중턱에서 혹시 모를 도주와 충원을 차단하기 위해 수도원 지붕에 앉아 있었다. 오래되고 작은 수도원에는 늙은 수녀뿐이었고, 드렉슬러는 칠이 벗겨진 십자가에 몰래 올라가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평균을 훌쩍 상회하는 시력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인적이라고는 없는 수도원 지붕에 앉아 늙은 수녀의 라틴어를 듣는 일보다는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그 고지식한 기사의 반동이라 할지라도.


드렉슬러는 일지에 합금의 배율과 날의 기울기, 창신의 길이, 손잡이의 굵기, 강판의 두께, 장식의 위치, 무게, 재료 같은 세부사항을 적어넣었다. 랜스란 애초에 파괴되기 쉬운 무기였다. 드렉슬러조차도 네 번에 한번은 크게 보강하거나 새로 만들어야만 했다. 하물며 랜스를 검처럼 휘둘러대는 정신나간 기사님이라면 수시로 창을 완파시킬 것이 분명했다. 여분의 합금을 충분히 준비해야 할 터였다. 그의 합금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 자는 드물었으므로, 로라스는 드렉슬러의 고객이자 주요한 피실험체가 되어 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길이와 모양이 제각각인 창이 벽에 걸려 있었다. 총이, 화염과 독가스가 지배하는 전장에 구시대의 유물을 들고 뛰어드는 그들을 많은 이가 조롱했다. 자신의 목표조차 모르는 비열한 전장. 드렉슬러는 주위에서 부르짖는 고결에 동조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이 뚫을 심장을 직시하는 정도의 정신머리는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성명을 하고 문장을 교환하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창이 향할 궤적을 똑바로 바라볼 책임의 이야기였다. 서늘한 투사체가 팔을 떠날 때의 강렬한 감각의 수용이었다.


드렉슬러는 기사가 아니었다. 사실 그는 살아오며 기사라고는 단 한 명밖에 만나보지 못한 터였다. 드렉슬러는 내심 그 기사가 배반하기를 기다렸다. 왕실과 교회는 기사의 신념에는 너무도 추악하고 더러웠다. 기사는 젊었고 이국이 보여주는 온갖 환락과 희망, 영화가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기사는 그대로 전진했다. 전진하고, 상승하고, 마침내 다다른 산꼭대기에서 스스로 패배했다. 왕실도, 교회도, 영광도 아닌 피흘리는 애송이에게. 기사는 배반자가 아니라 광신자였다.


미친 기사는 반동을 꿈꾸었다. 세상을 과거로 되돌리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계를 되감아도, 아무리 세월을 거슬러 태초에 다다른다 해도 반동을 꿈꾸는 이들이 상상하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덴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태초부터 고통스러웠다는 것이었다. 바벨이 의미하는 바는 문명의 여명부터 언어는 달랐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에 없는 것을 갈구했다. 그렇다, 이천 년 전에 사라져버린 어느 위대한 대속 같은.


드렉슬러는 무료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 둘씩 새 무구를 다듬었다. 창과 투구, 흉갑, 건틀릿, 부츠, 무릎덮개 따위가 모루와 강판 위를 오르내리는 동안 로라스의 창은 줄곧 공방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드렉슬러는 이따금 주인이 오지 않는 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라스는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3개월이 훌쩍 넘고 있었다. 거리를 감안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자신이 만든, 타인의 무구를 쓰다듬어보다 드렉슬러는 문득 깨달았다.


그는 패배했다.


패배한 채 주군에게 돌아간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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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고아레